[시론/김일영]새로운 사회계약 필요하다

  • 입력 2008년 12월 30일 03시 02분


어려운 한 해였다. 상반기는 촛불시위로, 하반기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편할 날이 없는 한 해였다. 특히 5월부터 세 달 남짓 지속된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실로 컸다. 집권 초 밤마다 광화문을 밝힌 촛불행렬에 잔뜩 위축된 이명박 정부는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에 직면해서도 아직 발 빠르고 자신 있는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낮에는 공권력이 질서를 유지하지만 밤만 되면 도심이 시위대로 뒤덮이는 ‘이중권력’ 상태가 이어지던 지난여름의 한국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우려하던 무질서 상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의 21세기적 모습을 한국에서 보았다고 하지 않았을까.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던진 가장 큰 과제는 모든 분야에서 권위구조가 붕괴되어 한국이 통치불능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어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적 권위가 필요한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다. 언론매체도 보도의 객관성을 의심당해 권위를 잃어버린 채 편을 갈라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대학은 본래 해석(解釋)의 권위를 지닌 제도인데 이마저도 인터넷을 점령한 소위 ‘집단지성’ 앞에서 권위를 잃은 채 초라해지고 말았다.

권위붕괴가 통치불능 낳을수도

이런 상태에서 이명박 정권이 남은 기간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사태를 이명박 정권에 국한시켜 보는 것은 단견이다. 포스트(post) 이명박 정권에도 같은 질문이 던져질 개연성이 대단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등장할 정권은 진보 보수에 상관없이 언제, 어떤 이유로든 촛불시위에 봉착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이 점에서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이명박 정권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 권위구조 통치력을 어떻게 확보·유지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17세기 영국 사회의 무질서 속에서 홉스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였다.

홉스는 구성원 사이의 사회계약에서 해결책을 찾았는데 지금의 한국이야말로 이런 홉스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도 ‘새로운 사회계약’을 통해 포스트 민주화 단계에 맞는 공동체의 질서와 권위를 회복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지금처럼 거리에서 시위대가 청와대와 직접 맞닥뜨리는 사태, 그 사이에서 정당과 국회는 존재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태는 우리에게 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국가-사회 관계가 무엇인지를 숙고해 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하에서 한국은 강한 국가-약한 사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987년 개헌을 통해 사회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이후 급성장했다. 이익집단의 힘이 세지고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커져서 이제는 거꾸로 권위가 추락한 국가의 위상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촛불시위 사태는 한국이 약한 국가-강한 사회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질서와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를 제약하던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런 구시대적 사고는 국가-사회를 하나가 강하면 다른 하나는 약해야 하는 영합(zero-sum)적 관계로만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둘 사이의 관계는 충분히 비영합(non zero-sum)적일 수 있으며, 그 점에서 강한 국가-강한 사회의 조합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국가가 강해야 하지만 그런 국가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 역시 강해야 한다는 말이다.

강한 국가-책임있는 사회로 가야

다만 국가, 사회 모두 그냥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강한 국가는 규모는 줄이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능력과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은 커진 국가이다. 사회도 지금처럼 강하기만 하고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강한 국가를 견제하기보다 뒷다리 잡기에 급급해 국가의 능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결국 작지만 강하고 능력 있는 국가와 강하지만 책임 있는 사회의 조합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한국이 지향할 바이며, 지금은 이런 방향으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모색해 민주화 시대의 부정적 유산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새해에는 이 점에서 진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