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홍규]워룸보다 급한 인사시스템

  • 입력 2009년 1월 9일 02시 58분


퇴근길 지하철, 옆자리의 두 젊은이가 대화를 나눈다. “청와대에 워룸을 설치한대.” “웬 워룸, 우리가 지금 가자지구에 있는 거야?” 그렇다. 서울은 가자지구가 아니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정부의 충정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나간 일이다.

정부가 위기를 진정 기회로 만들려면 몇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정부에 남다른 판단능력이 있어야 한다. 위기(crisis)의 영어 어원을 찾아보니 그리스어로 ‘krinein’이고, 이는 ‘판단하는 능력’을 뜻한다. 판단능력은 올바른 정책에 집중할 줄 아는 능력, 그리고 국민의 마음을 미리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런데도 정부의 대책엔 선택과 집중은 없고 과거식의 나열만 있으며,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의 마음을 가라앉힐 우선순위가 보이지 않는다. 4대 강 정비도 좋고 녹색뉴딜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 거리로 내몰릴 영세업자, 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고, 그 예산은 충분하게 확보됐는지다. 워룸까지 만든 정부가 말하는 ‘충분하고 선제적’ 조치의 의미는 우선 이런 기본적인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란 또한 때가 있는 법이다. 위기극복에도 때가 있다. 대책에도 시중(時中)이 필요하다. 대통령도 비상경제의 ‘속도전’을 강조한 바 있다. 야당이 발목을 잡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정부의 위기대응 속도는 미국에 비해 너무 늦어 보인다. 일부 언론 보도와 같이 고위공무원 인사한다고 흔들어 놓고 한 달 이상 그냥 시간을 보내서는 더욱 속도를 낼 수 없다. 구조조정과 같은 몇 가지 일만이라도 책임을 지고 확실하게 속도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정부가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정부란 시스템과 사람의 결합이다. 선진화된 시스템이란 업무의 선택과 집중, 기능의 조정과 통합, 프로세스의 표준화와 맞춤화 등이 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이것들이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하루아침에 선진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사람의 능력으로 이를 메워야 한다. 즉 인재를 제대로 고르고, 이를 제대로 부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갖다 놓아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성과를 낼 수 없는 법이다.

성과를 내려면 청와대의 만기친람 식 개입이 아니라 장관에게 정책과 인사 권한을 제대로 주고, 그런 다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청와대가 잘못 개입하면 내각은 자기 의견이 있더라도 청와대의 뜻에 따르기 마련이다. 이러면 지시는 되지만 지혜가 모아지지 않는다. 또한 부처 간의 조정과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많은 부처 간 회의가 있지만 그 회의가 형식적 회의가 된 지 오래다. 부처의 할거주의는 이런 피상적인 조정 속에 숨어 있다. 이왕 만든 워룸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런 벽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정부 내 소통의 부족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소통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는 신하에게 끊임없이 직언과 간쟁(諫爭)을 요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을 경청했다.

지금 우리 국민은 불안하다. 정부가 위기대응의 내용과 속도에서 신뢰를 주지 못하니 더 불안하다. 특히 이번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와 비교하여 국민의 힘이 모이지 못하고 매우 파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정부가 희망적인 위기의식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위기의식은 워룸이란 문패로 나타날 것이 아니라 정책 콘텐츠와 시스템에 나타나야 한다. 피터 드러커는 열심히 하는 능력이 아니라 통찰력이 중요하다 했다. 정부에도 그런 통찰력을 기대한다. 통찰력이란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다.

이홍규 한국정보통신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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