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별명을 잃어버린 대한민국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월스트리트저널은 며칠 전 한국(KOREA)을 인도(INDIA) 중국(CHINA)과 함께 'ICK'라는 새로운 국가군(群)으로 지칭했다. 이 신문은 “2009년에는 BRIC(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을 잊어라”면서 “현재의 주식 가격을 고려할 때 올해 가장 높은 수익증가가 예상되는 신흥시장은 인도 중국 그리고 한국, 즉 ICK 국가들이다”라고 전망했다. 여러모로 반가운 기사였다. 한국 경제에 대한 희망적인 예측이 반가웠고, 모처럼 우리가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 인도와 공동으로 ICK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갖게 된 것도 뿌듯했다.

讚辭와 汚名의 갈림길

과거 우리에게는 다양한 별명이 따라다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은 1960, 7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아시아의 용’과 ‘신흥공업국’으로 주목받았다. 이들 별명에는 전쟁의 비극을 딛고 우뚝 선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찬사가 담겨 있다. 땀과 눈물로 이루어낸 결실이기에 경제성장의 주역들은 그런 별명을 들을 때마다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배들이 만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선진 강대국은 저만치 앞서가고 경쟁국이었던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 새롭게 세계의 각광을 받는 동안 한국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경제 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9570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11위 러시아와는 3300억 달러, 12위 인도와도 1400억 달러 차이가 난다. 앞선 나라를 추월하기보다는 오히려 바짝 뒤쫓고 있는 14위 호주(9080억 달러)와 15위 멕시코(8930억 달러)가 우리를 앞서는 시나리오가 훨씬 그럴듯해 보인다. 반면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지수 조사에서 줄곧 세계 40위권에 머무는 것을 비롯해 한국의 후진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최근 국내 상황을 보면 한국이 경제적으로 힘을 내 기분 좋은 별명을 다시 얻기보다는 오히려 오명(汚名)을 훨씬 빨리 얻을 것만 같다. 이번 주 시사주간 타임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우리 국회의 폭력사태를 선정해 표지 사진으로 실었다. 타임은 기사에서도 한국을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갖고 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는 거리가 먼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하나로 분류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다.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 양모(羊毛) 생산 확대를 위한 엔클로저 운동으로 촌락공동체가 파괴되고 수많은 농민들이 쫓겨나자 토머스 모어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할 양이 오히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어이없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모어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둥인 국회가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있다. 국회뿐 아니라 일부 국민도 민주주의를 잡아먹는다. 타임은 국회 폭력 장면과 함께 지난해 광우병 사태 때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사진을 실었다. 거리로 몰려나와 국정을 마비시킨 광우병 시위대의 행동이 선진국의 눈에 민주주의를 망치는 폭력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국회가 민주주의 잡아먹었다

세계에 투영되는 대한민국의 위상과 이미지는 국민 모두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층이든 정치인이든 투쟁과 과격 이미지를 증폭시켜 국가에 해악을 끼쳤다면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이 없다. 국민의 자해행위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곧 국가브랜드위원회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출범한다.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목표라는데 무엇보다 국가 위신에 먹칠을 하는 행동부터 뿌리 뽑는 국가적 각성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월스트리트저널 덕분에 한국이 자랑스러운 별명을 다시 얻었으면 하는 기대를 잠시 해봤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세계는 한국을 비웃고 있다. 이러다가는 자라나는 세대들은 영영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지 못할 것만 같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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