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살아 있지만 속은 빈 S&L이 더 늘어났다. 에드워드 케인 미국 보스턴대 경제학 교수는 이를 ‘좀비 S&L’이라고 불렀다. 움직이는 시체라는 뜻이다. 좀비 S&L은 앞 다퉈 고위험-고수익 투자에 손을 댔다. 사막에 쇼핑몰을 짓기도 했다. 사실상 망한 상태여서 도박에 실패해도 잃을 것이 거의 없지만, 운이 좋다면 회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멀쩡한 기업까지 ‘좀비’ 만들어
고위험 투자로 돌아선 좀비 S&L이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시중자금을 쓸어가자 멀쩡한 S&L도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실이 확산됐다. 좀비가 흡혈귀 속성까지 띠면서 건강한 S&L마저 좀비로 만든 것이다.
1989년에야 미국 정부는 이들의 정리에 착수해 전체의 25%가 넘는 750개 지급불능 S&L 자산을 몰수했다. 건전성 규제도 대폭 강화했다. 옥석(玉石)이 가려지자 살아남은 S&L은 신뢰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조치가 늦어지면서 구제금융 비용은 1986년 예측된 150억 달러의 10배인 1500억 달러로 커졌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지 않은가. 그렇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와 닮은꼴이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당시 종금사의 외채상환능력 상실이었다. 금융자유화로 종금사의 업무영역이 넓어졌지만 당국의 감독은 뒤따르지 못했던 것. 이 문제는 30개 종금사 중 28개를 퇴출하면서 일단락됐다.
당시 케인 교수도 한국에 대해 한마디했다. “한국의 은행은 주술사(정부)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 뱅크”라고. 국내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부실기업을 ‘강시’라 불렀다. 월가는 한국을 가리켜 뱀파이어(흡혈귀) 경제라고도 했다. 이런 설명이 붙었다. “한국에서는 좀비 기업이 돌아다닌다. 그 때문에 멀쩡한 기업까지 ‘혹 좀비가 아닌가’ 의심받는다. 한국 기업이 주가나 신용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이래서 생긴다.”
10여 년이 지난 요즘의 금융상황도 그 구조가 비슷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2.5%로 내리며 돈을 쏟아 붓지만 신용경색은 여전하다. 은행에는 돈 홍수가 났는데 기업은 돈 가뭄에 허덕이니 더 답답한 노릇이다. 당국이 은행의 자기자본비율 기준까지 낮춰줬지만 상황은 여전하다. 근본 이유는 강시 기업이다. 신속한 구조조정으로 퇴출기업을 가려줘야 하는데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모르니 은행은 돈을 내놓지 않는다.
그동안 정부는 많은 대책을 내놓았다. 채권단이 대주단으로 이름을 바꿔 회의를 거듭하고, 명망 있는 원로가 수장으로 오고,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긴 이름의 구조조정 전담기구가 생겨나기도 했다. ‘조만간 판가름 난다’ ‘내달이면 옥석이 가려진다’는 발표도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진행된 것은 별로 없다. 반면에 퇴출을 피하기 위해 정치권과 지역정서에 기댄 기업의 로비가 기승이다.
말로만 구조조정에 로비 기승
경제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 수위는 날로 높아가고 지하벙커에 워룸까지 만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지난 정부 때 말만 많고 실천은 없다고 해서 ‘NATO(No Action Talk Only) 정부’라 했는데 지금은 뭐가 다른가. ‘속도전’ 구호에 굼벵이 행보다.
강시 기업은 당국의 우유부단을 먹고산다. 케인 교수는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좀비의 도박도 나타나지만, 문제를 덮고 상황 호전만 기다리는 ‘관료의 도박’도 흔히 관찰된다”고 지적했다. 우리 금융당국은 언제 이 도박판을 떠날 것인가. 국민경제를 판돈으로 건 위태로운 도박에서….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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