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메모리] 태평양 영웅 여태구, 봉사의 바다서 ‘제2 항해’

  • 입력 2009년 1월 14일 08시 56분


장애우 보육원 운영 전 프로야구 선수 여태구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와 SK 와이번스로 이어지는 인천야구 변천사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들은 징검다리의 인생을 살다갔다.

추억의 샘을 자극하는 이름, 태평양 돌핀스(1988년-1995년). 그 시절, ‘동네북 신세’의 설움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인천팬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오며 자수성가한 아버지 세대와 같은 고마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태평양은 삼미와 청보가 물려준 연패의 유산을 이어받아 허약한 체질로 출발했지만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키는 녹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고서 약체를 탈피하기 위해 악착같이 몸부림을 쳤다.

정작 자신들은 정상에 서지 못하고 떠났지만 현대와 SK가 인천땅에서 3차례나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

태평양을 떠올리면 잊을 수 없는 선수가 있다. 여태구(46). 얼굴은 어렴풋해도 독특한 그 이름은 아직도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청보를 인수해 태평양이 탄생한 1988년 신인으로 입단한 그는 태평양이 사라진 1995년 운명공동체처럼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지적발달 장애우들과 어울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지적 장애우들과 살아가는 제2의 인생

빠른 발을 자랑했던 날렵한 맵시는 사라지고 얼굴 만큼이나 둥글둥글해진 몸매. 동인천역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거창하게 사회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안내로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인천 내동에 자리잡고 있는 ‘무지개 주간 보호센터’로 들어갔다.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지적발달 장애우 보호센터.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 고향집처럼 푸근함이 물씬 묻어났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새장이 눈길을 끌었다.

“용접을 배워서 제가 직접 새장을 만들었어요. 꽃밭이며 평상도 제가 만들고. 봄이면 꽤 운치가 있을 거예요. 원래 이런 기술은 없지만 하나씩 하나씩 만들다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도착한 무렵은 점심시간. 지적 장애우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진 고기반찬부터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개구쟁이처럼 옆자리 친구의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갖다댔다. 순간 폭소가 터졌다.

여태구는 “○○는 고기를 워낙 좋아해. 사이좋게 나눠먹어”라며 그 친구의 등을 토닥거렸다. 옆 자리의 친구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부침개를 집어 여태구의 입에 넣어주는 깜찍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구태여! 구태여!’로 유명했던 사나이

인호봉, 감사용, 금광옥…. 삼미 시절부터 인천팀 선수들의 이름은 독특한 것으로 유명했지만 여태구라는 이름 또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

“여태 구경하다 왔냐?”, “여태 그러구 있냐?”,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냐?”…. 80년대 인천 도원구장 외야 관중석의 술 취한 관중들은 그의 등 뒤에 대고 고함을 지르며 장난을 쳤다.

그가 안타를 치면 팬들은 “여태구! 여태구!” 대신 이름을 뒤집어 “구태여! 구태여!”를 외쳤다.

동산고와 인하대 시절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 1차지명으로 청보를 인수한 태평양의 초대멤버가 됐다.

그러나 간판만 바뀌었지 약팀에도 약하고, 강팀에는 더 약한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시즌 개막과 함께 6연패, 그리고 1승 후 다시 7연패. 이러던 중 신인 트리오 여태구 곽권희 원원근이 간간이 연패를 끊어주는 반짝활약에 인천팬들은 위안을 삼았다.

88년 5월 17일 해태와 3-3 동점을 이루던 9회말 2사 1·2루서 7번타자 여태구는 끝내기 2루타를 터뜨렸다. 당시 최강 해태의 12연승 가도를 저지한 한방에 팬들은 도원구장이 떠나갈 듯 “구태여! 구태여!”를 외쳤다.

89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장 14회말 선두타자 김일권이 중전안타로 나갔지만 홍문종과 유동효의 범타로 2사 1루로 변해 15회로 접어드는 분위기.

여기서 여태구는 중전안타로 1·3루 기회를 만든 뒤 도루까지 성공했다. 그리고는 김동기가 김성길을 상대로 끝내기 3점홈런을 터뜨렸다.

그날의 영웅은 단연 14회 무실점으로 완투한 박정현과 결승홈런을 친 김동기였지만 여태구 또한 승리의 징검다리를 놓은 숨은 영웅이었다.

○고마워요 김성근 감독님, 그리고 SK

1995년 말 태평양이 현대에 넘어가면서 그도 같이 유니폼을 벗었다. 3할타율에는 한번도 이르지 못했지만 89년(0.287)과 90년(0.281), 92년(0.290)에는 꽤 높은 타율을 올렸고, 8시즌 중 5시즌은 두자릿수 도루를 작성하기도 했다.

인하대 1학년 때 어깨를 크게 다치면서 송구능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지만 빠른 발과 요긴할 때 한방을 쳐주는 소금같은 존재였다.

“태평양팬들에게 참 미안했어요. 89년 3위할 때, 94년 준우승할 때 빼고는 상대팀 스파링파트너였죠. 그래도 야구인기는 대단했어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해요. 술 마시고 나무 위에 올라가 야구를 구경하다 떨어지는 사람, 도원구장 옆 가정집 옥상에 올라가 야구 훔쳐보는 사람, 응원석의 쿠웨이트박 아저씨, 고릴라 아저씨까지….”

그는 은퇴를 했지만 이제는 야구팬으로 살아가고 있다. 특히 2007년과 2008년 SK가 2년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고 했다.

“저는 인천팬들한테 그런 선물을 해주지 못했는데 SK 후배들이 다 풀어줬잖아요. 김성근 감독님도 존경스럽고, 후배들도 자랑스럽고. 이제 SK팬이에요. 야구경기 중계하면 매일 보면서 응원해요. 아직도 전 야구 무지 좋아합니다. 가족들하고 몰래 외야석에 표 끊고 들어가 응원하기도 했어요.”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는 은퇴 후 동산고 코치로 1년 반, 서림초등학교 감독으로 5년간 지냈다. 그러던 그가 장애우를 돌보는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했다.

“장인어른은 사업을 하셨고, 장모님은 인천여고 교감을 지내시면서 30년간 교편을 잡으셨어요. 이 일에 뜻이 있으셨죠. 그런데 연세가 팔순이 넘으니까 아내보고 해보라고 하시면서 도와주셨어요. 아내는 사회복지를 전공해 예전부터 장애우들을 돌보고 있었죠.

제가 벌어놓은 돈도 많지 않아 보육원을 여는 것이 여의치 않았는데 장인 장모께서 금전적으로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내 혼자 일을 하는데 저도 동참하겠다고 얘기했죠.

야구하면서 많은 혜택과 사랑을 받았잖아요. 이젠 베풀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에 큰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하지 뭡니까. 자기도 봉사하고 장애우 돌보면서 살고 싶다면서요. 아들까지 동참한 셈이죠. 어린애로만 생각했는데 참 기특하고 대견해요.”

아내 유영희씨가 옆에서 “그렇잖아도 남자 선생님이 필요했는데 남편이 함께 있으니 너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음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

그에게 아쉬운 점은 전국에 장애우는 많은데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하다는 점. 구청의 요청으로 1년이 지나면 현재의 장애우를 내보내고 다른 장애우를 받아야한다고 한다.

“참 난감해요. 장애우가 아니라 제 식구이자 가족이라 생각하니까요. 여기는 그래도 시내여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생활도 할 수 있고, 프로그램에 따라 반복훈련을 잘 하면 상태가 많이 좋아지거든요. 대부분 가정형편도 좋지 않아 여기서 나가면 열악한 시설로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는 현재 9명을 데리고 있지만 앞으로 25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시설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 장애우를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지만 즐겁다고 했다.

아침 저녁마다 차로 장애우들을 집에서 데려오고, 집으로 데려주는 것도 그에겐 행복이다.

“이제 이 일이 제 평생의 목표가 됐어요. 불우이웃돕기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좋잖아요. 그런 면에서 제가 장애우들에게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결국은 제가 도움을 받는 거죠. 제가 행복해지는 거니까. 올해는 이 친구들과 함께 문학구장으로 나들이해 신나게 SK를 응원하고 싶어요.”

모두들 돈을 좇아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 그러나 행복의 크기는 어쩌면 마음의 크기와 비례할지 모른다. 여태구는 징검다리로 살다간 돌핀스처럼 장애우와 비장애우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의 삶을 선택했다.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행복의 정석 아닐까.

※PS-그는 최근 경기가 침체되면서 후원도 크게 줄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더더욱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는 독지가들의 방문과 도움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행복을 같이 나누자면서…. 무지개 주간 보호센터 도움주실 분 : (전화)032-762-3303

인천 |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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