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남자의 눈물

  • 입력 2009년 1월 19일 02시 58분


야구기자 초년병 시절. 그때는 몰랐다. 그 눈물의 의미를.

태평양 김성근(현 SK) 감독은 1990년 시즌을 마치고 옷을 벗었다. 직전 해 만년 꼴찌 인천 연고팀을 사상 처음 포스트시즌에 올려놓는 돌풍을 일으켰는데도 말이다. 그 중심에 기자가 있었다. 그의 까칠함에 비수를 품었던 기자는 뭔가 걸리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임호균 각서 파동. 임호균이 선발로 5승을 거두지 못하면, 감독이 왜 옷을 벗겠다고 했는지 앞뒤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났고 ‘약속대로’ 김 감독은 자식 같던 선수들과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2년 뒤. 빙그레 김영덕 감독이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지고 난 뒤 인터뷰를 거부한 채 사라졌다. 고래심줄보다 질긴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렸던 그의 6번째 좌절이었다. 하지만 인정사정 봐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배웠다. 100m달리기로 전력질주한 뒤 굳게 잠겨 있는 감독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난입이란 표현은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로 흥건해진 책상. 순간 움찔했지만 노(老)감독은 더 회한에 잠길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포스트시즌이었다.

세월은 흘러 ‘감독님’이 ‘형님’으로 바뀌어갈 무렵인 2003년. 인천 팀 SK는 조범현(현 KIA) 감독의 취임 첫해 대단한 돌풍을 일으켰다.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쳤지만 삼성과 KIA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현대에 3승 4패로 져 아쉽게 꿈을 접은 조 감독은 “사부이신 김성근 감독님께 우승컵을 바치고 싶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 감독은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SK 사령탑이 된 김 감독과 큰 불화를 겪었지만 이야기가 옆으로 샐 염려가 있어 이는 생략하기로 한다.

지난해에는 두산 김경문 감독의 얘기가 가슴을 때렸다. “떨어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새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헹가래를 당하는 감독들 사진을 유심히 봐라. 아래를 의식하고 있다. 언제쯤 선수들의 손이 자신의 몸을 받쳐줄지를.” 코칭스태프엔 금메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시상식 때 처음 알았다는 김 감독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 인생의 절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두 달 후 한국시리즈에선 패장이 됐다. 감독 생활 5년 만에 3번째 준우승이었다. 야구팬이면 다 알겠지만 상대는 SK 김성근 감독이었다.

희한하게도 앞의 네 감독은 두산의 전신인 OB에서 감독 코치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다. 네 명 모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두 노감독은 우리말보다는 일본말이 익숙했다. 포수 출신인 두 젊은 감독은 선수 시절 유승안 이만수의 그늘에 가렸다.

그리고 며칠 전. 이번에는 기자보다 열 살이나 어린 박찬호의 눈물을 보았다. 팀 내 불안한 입지 때문에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다는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였다. 박찬호는 필라델피아 이적 후 미국에서 입단 기자회견조차 하지 못한 처지를 한탄하며 수많은 사람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천하의 박찬호가 흘린 눈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 비로소 명확해졌다. ‘박찬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구나.’

좌절과 패배, 눈물이 감동이 되는 스포츠의 세계. 그때는 몰랐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 현장을 누비던 기자로서의 열정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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