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고3 엄마 뿔났다

  • 입력 2009년 1월 21일 02시 56분


죄인 아닌 죄인들, 형기는 대체로 1년이다. 때로 2년(재수), 3년(삼수)으로 형기가 속절없이 늘기도 한다. 가석방(수시합격)의 은전(恩典)을 받는 사람도 있다. 입시철만 되면 자식 때문에 속 타는 ‘고3 엄마’ 얘기다.

#A 씨=“대치동 학원 앞에 주차할 데가 없어 골목길을 얼마나 빙빙 돌았는지. 다음 학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애가 먹고 남은 간식 봉투를 ‘엄마’ 하며 툭 건네는 바람에 한 손에 핸들 잡고, 다른 손엔 봉투 들고…. 정말 기막히더라. 그래도 합격만 해주면….”

1∼3년형 받은 죄인 아닌 죄인

#B 씨=“남편이란 사람은 손끝 하나 까딱 않고 1년 내내 혼자 발만 동동 굴렀다. 잠이 많아 아침마다 전쟁을 하듯 깨우고 또 깨웠는데….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학원정보 구하고 애 수발드느라 생고생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됐네.”

#C 씨=“어릴 때부터 놓아먹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네. 알아서 하겠다고 잔뜩 큰소리만 치더니, 아무래도 재수를 시켜야 할 것 같아. 스카이 대학에 보란 듯 합격시켜 시댁 식구들에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봤으면 했는데….”

연말연시 이런저런 모임에서 만난 고3 엄마들의 기막힌 사연과 체험담이다. 정시 발표를 앞두고 수험생을 둔 40대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동병상련으로 이들은 남편과 자녀들에 대해 푸념하며 팍팍한 심사를 달랜다.

10명 중 2명 남짓 대학 문턱을 넘던 20여 년 전 이들도 고3이었다. 새벽마다 대접에 물 떠놓고 빌던 당시의 고3 엄마들은 정성껏 도시락 싸주고 간식 준비만 하면 그만이었다.

10명 중 8명이 대학을 가는데도 실질적인 경쟁은 요즘 더 치열해졌다. 형편이 나아진 데다 핵가족화로 자녀를 상전 떠받들 듯하면서 그리 됐다. 덩달아 고3 엄마 스트레스도 두세 배 더 심해졌다.

소설 연극 드라마에서 ‘엄마’가 뜨고 있다. 신경숙 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20만 부 넘게 팔렸다. 그러나 고3 엄마는 여전히 힘들고 외롭다.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 줘’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 줘’라는….” 엄마가 힘들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신 씨는 코끝이 찡하게 그려냈다.

‘고3 아빠’라는 말은 세상에 없다. 오직 고3 엄마가 있을 뿐이다. 엄마의 어원은 어미의 옛말인 ‘엄(母)’에 조사 ‘아’가 붙어 유래한다. 배 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엄마라는 말을 처음 옹알거렸던 그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을 잊어버릴 사람이 있을까.

고3과 엄마라는 단어가 하나로 되면, 그 ‘헌신(獻身)의 숙연함’으로 가슴이 저려 온다. 입시가 전쟁으로 비유되는 현실에서 전사(戰士)로 나선 아들딸을 위해 고3 엄마는 누구든 기꺼이 제 한 몸 던져 방패가 되고, 손발이 될 수밖에 없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엄마를 부탁해’ 36쪽)

엄마도 약하고 여린 여자란다

고3들아, 잠자리는 껍질을 벗고 날아오르는 우화(羽化)의 힘든 과정에서 때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흔히 쓰는 탈피(脫皮)라는 단어에는 삶의 이런 치열함과 비장함이 배어 있다. 언젠가 너희도 대학 입시라는 모진 과정을 거쳐 세상의 하늘을 날게 되겠지.

너희를 감싸고 돌보았던 강인한 고3 엄마도 알고 보면 한없이 여리고 가엾은 존재다.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상극 아닌 상극이 되어 때로 신경전을 하며 엄마 속을 심하게 긁은 일도 있을 거다. 그럴 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뒤돌아서 눈물을 삼키고,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속을 어미는 애써 숨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의 하늘 위를 날게 되면 너희도 뒤늦게나마 그때의 진실을 알게 될 거다.

내 아내도 속이 타버린 고3 엄마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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