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애견과의 작별

  • 입력 2009년 1월 28일 02시 59분


새해 초 화가 K 교수 댁 애견 ‘자스민’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년 점심 모임에 K 교수가 갑자기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16년을 함께한 암컷 애견 포메라니안이 위독해 작가인 부인 J 씨를 비롯해 집안이 온통 공황상태라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털북숭이 애견이다. 사람으로 치면 100세가 넘었으니 일어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위로를 건네며 회복을 기원했다.

화가 K씨 가정의 애틋한 인연

K 교수에 따르면 자스민은 가족 중 막내와 가장 친했고 다음이 큰아이, 이어 자신과 아내의 순이었다고 한다. 막내가 대학생이 되고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늘 막내의 발치에서 잤다. 형제가 입시 준비를 하느라 새벽녘이 돼 돌아올 때면 어두운 현관 신발장 옆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형제 중에 하나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현관을 떠나지 않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나무라려 들면 짖어대며 막기도 했다고 한다.

음식은 물론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 보름간을 투병하면서도 자스민은 형제의 방문 앞을 지켰다. 다른 쪽으로 옮겨 놔도 한밤중에 사력을 다해 몸을 움직여 아이들 방으로 향했고, 목을 틀어 군에 간 둘째 아들의 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12일 오전 6시경 자스민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화가와 작가는 자스민을 작은아들이 입던 헌 옷에 정성스럽게 싸 화실 근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큰아들은 작은 봉분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 가족의 지극한 애견 사랑에 감동해 위로의 글과 단편 영화 한 편을 USB 메모리에 담아 보냈다. 서울에 모처럼 함박눈이 내린 날이었다.

“새해 전해진 애견 자스민의 슬픈 소식은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문상은 가지 못했지만, 마침 10분 55초짜리 단편 영화 한 편이 있어 보내드립니다. ‘마리모’라는 개와 ‘미카짱’이란 소녀의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얼마 뒤에는 ‘내 친구 말리’라는 영화가 개봉됩니다. 몇 해 전 제가 감동 깊게 읽은 논픽션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말썽꾸러기 개 이야기지요. 두 영화의 결말은 ‘사람과 개는 결국 헤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평안하게 헤어지는지가 중요한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좋은 주인을 만나 천수를 누린 자스민도 분명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식구들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모처럼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려 고궁에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봄이 되면 눈 덮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듯 자스민을 잃은 슬픔도 서서히 걷히고, 또 다른 인연이 찾아올 것입니다.”

며칠 뒤 J 씨로부터 답이 왔다.

種을 초월한 깊은 연대감으로

“자스민이 떠난 지 사흘, 오늘 새벽엔 꿈에 나타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이젠 정말 영원히 먼 곳으로 가나 보다 했지요. 큰애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제 꿈엔 매일 나타나요, 하네요. 나이가 어릴수록, 영혼이 맑을수록 이별의 슬픔을 더 깊게, 강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16년을 같이 살다 보니 종을 초월한 연대감이 생겨나 칼로 자르듯 잘라지지가 않네요. 며칠 동안 한 생명이 소멸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마지막엔 떠먹이는 물마저 삼키지 못하는 모습, 고통을 호소하는 눈동자를 지켜보는 게 사실은 이별의 아픔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겪어야만 할 과정이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선물을 받아들고 보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볼 자신은 없습니다. 조금 더 강해진 후에…(다음 주쯤). 시간이 흘러가고 슬픔이 사라진 후에도, 그 이름을 부르며 더 이상 울지 않게 될 때에도, 자스민을 생각하면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그걸 고맙게 생각하려 해요.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 요즈음이었습니다. 삶이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것인지요…. 진심어린 위로, 정말 고맙습니다.”

개를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은 그만큼 세상도 사랑하고, 말 못하는 짐승도 정을 주는 것만큼 반응한다고 나는 믿는다. 새해 첫 달, K 교수 가족과 애견 자스민의 ‘아름다운 작별’이 내게 준 선물이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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