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는 한발 더 나아간다. 뉴욕타임스의 가치를 아는 독자들이 주식을 매입하게 된다. 어떠한 상업적 공격도 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결권을 시민들이 확보한다고 내다본 것이다. 샐먼은 시나리오가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영리 재단 스콧 트러스트가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영국의 고급지 가디언을 증거로 제시했다.
샐먼의 시나리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신문의 경제적 위기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저널리즘’에 관한 이야기이다. 둘을 하나로 묶으면 좋은 저널리즘은 어떤 경제적 위기에서도 시민의 보호로 지속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경제적 위기는 한국의 신문도 마찬가지지만 좋은 저널리즘의 논의는 어떨까.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제 논에 물대기식 논쟁에 골몰하는 이른바 주류저널리즘은 과연 좋은 저널리즘을 생산하는가. 꼭 묻고 싶은 질문이다.
짜깁기에 대한 분석 정교했어야
미네르바 사건을 다루는 태도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대부분의 신문이 전해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상기해 보라. 미네르바는 과연 누구인가, 미네르바는 몇 사람인가, 전문가는 뭘 했나, 미네르바를 키운 포털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등 말초적 궁금증 캐기, 책임 지우기가 거의 전부다. 미네르바가 내놓은 거친 주장에 대한 정교한 분석, 해석, 평가는 찾기 어렵다.
일부에서는 미네르바의 글이 대거리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외마디 같은 미네르바 주장의 수준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그 외마디가 동원한 사회적 혼돈의 수준도 대거리할 만한 것이 아닌가.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뒤흔들었던 파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인가. 외환위기 직후 언론학계에서 경제저널리즘의 부실함이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는 분석을 제시한 적이 있다. 경제위기와 함께 저널리즘의 위기가 드러났던 상황은 그때와 동일하다.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은 미네르바 이야기를 떠받치는 저변의 메커니즘을 주류저널리즘이 제대로 감지했느냐 하는 점이다. 미네르바는 검찰의 판단대로 한 사람일 수 있고, 신동아의 주장처럼 7명일 수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만일 미네르바가 다수이고 그것도 금융현업의 전문가라면 이건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바로 집단지성의 엄청난 위력이 현실화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지성이란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어떤 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므로 이를 조합하면 전체의 퍼즐을 꿰어 맞출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사회적 지식 생산의 새로운 논리이다.
미네르바가 박대성 일인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이버 공간의 엄청난 정보를 짜깁기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집단지성의 논리와 유사한 메커니즘이다. 사회적 지식 생산의 새로운 논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할 정도의 동원력을 발휘할 때 주류저널리즘은 뭘 하고 있었는가. 포털의 부실함, 블로그의 허상 등 디지털 담론의 흠집 찾기에 한눈판 채, 이 논리가 사회적 담론 생산자인 자신들의 발밑을 파내고 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닌가.
미시적 역량-거시적 감각 회복을
프로페셔널 주류저널리즘은 사회적 담론 생산의 독점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주류저널리즘 권력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책임이기도 하다. 권력이 무너지고 동시에 책임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저널리즘은 사회적 위기에 봉착한다. 미네르바 사건은 그런 위기의 징후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었다. 사회적 이슈를 제대로 평가하고 다루지 못하는 미시적 역량의 부족과 사회 작동 원리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거시적 감각의 둔함이 저널리즘의 위기를 초래한다. 역으로 말하면 좋은 저널리즘은 이 둘의 회복을 통해 가능하다. 미네르바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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