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2>

  • 입력 2009년 2월 4일 13시 58분


돌다리를 만나면 두드려라.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글라슈트는 스텝을 밟으며 링 중앙으로 나아갔다. 굼실굼실, 능청능청, 우쭐우쭐, 으쓱으쓱. 온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갈대처럼 흔들렸다. 무사시는 움직임이 없었다. 항아리를 끌어안듯 두 팔을 내민 채 글라슈트의 눈만 노려보았다. 다섯 바퀴 열 바퀴 열다섯 바퀴를 돌았지만, 무사시는 선제공격을 펴지 않았다.

야유가 점점 커졌다.

로마제국부터 지금까지, 격투장에 모인 구경꾼들은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기를 원하지만, 검투사부터 격투 로봇까지, 맞붙어 싸우는 이는 탐색하고 또 탐색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몇 차례 헛손질만 오간 후 1라운드가 끝났다.

글라슈트 팀장 볼테르는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듯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글라슈트를 박살내겠다는 무사시 팀의 장담에 기댄다면 벌써 난타전에 돌입했어야 옳다. 그러나 무사시는 철저히 선 수비 후 공격 전술을 취했다. 볼테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겨우 몇 마디 감탄사만 뱉었다.

"이런…… 아니지…… 에잇! 거기서부터…… 헛 참!"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작전을 변경한 쪽은 글라슈트였다. 잽을 날리며 인파이팅을 시도한 것이다. 무사시는 더킹으로 가볍게 스트레이트를 흘려보내고 강력한 더블 훅도 스웨잉으로 피했다. 글라슈트가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정타가 나오지 않았다. 공격 방법을 바꿔야만 했다.

제자리에서 솟구친 글라슈트의 왼발이 무사시의 얼굴을 노렸다. 무사시가 턱을 당기면서 가드를 올렸지만 글라슈트의 발바닥이 먼저 뺨을 후렸다. 뒷걸음질치는 무사시의 목을 밀면서 발등으로 장딴지를 걸어 돌렸다. 택견 기술 오금걸이에 제대로 걸린 무사시의 두 발이 부웅 떠올랐다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글라슈트는 쓰러진 무사시의 목덜미를 왼손으로 잡아 꺾었다. 오른 손날로 무사시의 목을 내리치려는 것이다. 글라슈트에게 손도끼질을 당하고도 버텨낸 로봇은 없었다.

글라슈트의 오른팔이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경기장은 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최후의 일격을 기대하는 시선들이 글라슈트의 손날에 집중되었다.

갑자기 글라슈트의 몸이 철망까지 튕겨나갔다. 무사시는 계속 궁지에 몰리면서도 반격하지 않았다. 글라슈트가 스텝을 밟으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손도끼질을 위해 글라슈트가 멈춰 서자, 무사시의 내지른 정권이 허공을 가르며 가슴을 때린 것이다.

무사시는 글라슈트의 목을 뒤에서 감싸고 두 발을 열십자로 엇갈려 죈 채 매달렸다. 백 마운트 포지션을 점한 것이다. 글라슈트가 허리춤에서 빨판을 쏟아냈다. 몸을 흔들고 사지를 비틀며 쿵쿵 뛰었지만 무사시는 떨어지지 않았다. 틈이 없으니 빨판도 힘을 쓰지 못했다.

볼테르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야! 엉덩잽이, 엉덩잽이!"

엉덩잽이는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빼면서 등 뒤의 상대를 어깨로 넘겨 앞으로 패대기치는 기술이다.

글라슈트가 양팔을 머리 뒤로 돌려 무사시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당겼다. 그러나 무사시의 목이 스프링처럼 쭉쭉 뽑힐 뿐 아니라 손목과 발목에서 톱니바퀴들이 오돌토돌 돋았다.

위이이이잉!

톱니바퀴들이 글라슈트의 빨판을 자르고 허리를 끊기 시작했다.

무사시의 톱니바퀴는 공식상한선인 지름 30센티미터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3센티미터에 불과한 톱니바퀴 열 개가 염주처럼 손목과 발목을 둥글게 감싸며 돌자 파괴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쇠가 깎여나가면서 불꽃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한 냄새까지 퍼져나갔다. 이윽고 생존 모니터링 칩이 '죽음신호'를 냈다.

무사시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볼테르가 갑자기 깔고 앉았던 간이의자를 링으로 집어 던졌다.

"비겁한 놈들! 등짝에 붙어, 이 죽일……."

그는 만류하는 꺽다리와 뚱보를 머리로 받았다. 사라와 민선이 차례차례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볼테르는 의자 두 개를 더 던졌고, 팀원들이 전부 뒤엉킨 상태에서 민선의 얼굴이 그의 무릎에 부딪쳤다.

"아아악!"

높고 가는 민선의 비명 덕분에 난동이 멈췄다.

볼테르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민선은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끼운 채 흐느꼈다. 링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진 글라슈트를 보듬는 이는 사라뿐이었다. 승리한 무사시를 노려보는 사라의 젖은 눈엔 살기가 충천했다.

 김탁환·정재승 소설 : ‘눈 먼 시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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