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으로 경제가 어려울수록 정치의 역할, 정부의 역할은 중대하다. 1929년의 세계대공황 이후 80년 만에 맞이한 대위기 속에서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요즘 간절하게 쳐다보고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기들 정부의 역량이다. 미국 유권자가 인종 갈등을 넘어 최고의 엘리트교육으로 단련된 젊은 지도자를 선택한 일이나, 일본 시민이 무기력의 밑바닥까지 보여준 자민당 아소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는 모습은 모두 절박한 위기 시대에 정치에 대한 희망과 좌절의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여의도의 무능력’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아예 외면하기만 할 수는 없다. 행정부와 의회가 함께 빚어내는 ‘정치 실종’의 뿌리를 밝혀야만 우리는 정치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필자는 국회의 무한대립의 뿌리를 단지 의원들의 자질, 후진적 정치문화에서만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누워서 침 뱉기일 수 있다고 본다. 그보다는 심층적인 문화 갈등, 그리고 제도와 행위규범 사이의 충돌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정치실종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
다수결과 합의제의 문화충돌
먼저 지적할 점은 다수결과 합의제 사이의 문화적 갈등이다. 여당이 내세우는 단독처리와 야당이 떠받드는 합의처리는 단지 정략적 대립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독처리와 합의처리의 평행선은 우리 안의 문화 충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는 국민에게서 다수 의석을 위임받은 세력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다수결 문화를 떠받들고 있다. 이들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민심을 정부가 강력하게 밀고 가라는 주문으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연 다수결 문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충분하게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깝게는 여야 정당이 몸담은 여의도 문화부터 다수결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필자가 야당의 폭력적 의사진행 방해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한나라당도 지난 10년간 야당의 처지에서 종종 합의처리의 방패를 꺼내들면서 다수결 문화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시야를 좀 더 넓혀 우리 일상생활을 보더라도 합의제 문화가 꽤 넓게 확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업이 이미 앞다퉈 도입한 팀제 운영, 경청의 리더십은 모두 합의제 문화의 성장을 보여준다.
그동안 미국 영국 호주와 같은 영어 사용권에서 다수결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데 비해 독일과 스웨덴에서는 합의제 문화가 득세했다. 이에 비해 1987년 이래 우리 민주정치가 걸어온 길을 보면 다수결이나 합의제 어느 쪽도 문화적 헤게모니를 얻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세대와 이념에 따라 다수결 문화세력과 합의제 문화세력으로 깊이 분열되어 있다. 다음 주에 여의도에서 재연될 여야 갈등은 단지 이 같은 거대한 문화충돌의 한 단면일 수 있다.
또 다른 요소는 제도와 행위 사이의 괴리이다. 사실 우리 정치권은 지난 몇 년간 눈에 띄게 합의제적 요소의 도입을 늘려 왔다. 2002∼2004년 개혁을 거치면서 당정분리 제도라든지 비례대표 의석 확대를 통해서 기존의 다수제 중심의 질서를 보완하는 개혁을 추진해 왔다.
게임의 규칙에 맞게 행동해야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자의 행동패턴은 아직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청와대는 여전히 여당이 일사불란하게 정부가 제출한 입법을 처리해주길 기대한다는 점에서 2004년 개혁 이전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또한 170석이 넘는 거대 한나라당의 구성원 역시 분권화 개혁 이후에 당내의 질서와 합의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운 행태만을 드러내고 있다. 정리하자면 여의도의 무한대결은 아직까지 제도와 행태의 조화, 충돌하는 가치관 사이의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회색지대에 빠져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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