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사려고 들어갔는데, 20대 후반의 백인 남자 직원이 다가오더니 삼성TV를 추천했다. 기자가 ‘한국인’이라고 밝혔더니, 반가워하면서 자기 이름이 ‘미스터 삼성’이라고 소개했다.
1년 동안에 삼성TV만 70여 대 판 뒤 붙여진 별명이었다. 동료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실제로 그의 이름이 ‘Mr. SAMSUNG’으로 등록돼 있었다. 결국 그의 추천을 받아 삼성TV를 구매했고, 이후에도 전자제품을 살 일이 있으면 꼭 그를 찾곤 했다.
귀국 후 올해 1월 미국 2위의 전자제품 유통업체인 서킷시티가 파산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앳된 모습의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결국 그를 포함해 서킷시티 직원 3만 명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어디 ‘미스터 삼성’뿐이랴. 미국에선 올해 1월 59만8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2007년 12월 이후 360만 개 일자리가 사라졌는데, 이 중 절반은 최근 석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실직폭탄’이 미국을 강타한 것이다.
요즘 미국 언론에는 일자리를 잃은 미국인들의 힘든 일상이 자주 등장한다. 자폐아 아이를 둔 30대 가장이 해고통보를 받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출근하던 길에 자신이 해고통지를 받은 대기업 부사장 등 ‘실직 스토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도 실업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핵심 노동력을 제공했던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저임 근로자) 실직자가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집단행동’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문화 때문에 시위가 거의 없었던 일본에서도 요즘 들어 시위가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구조조정의 1차 타깃이 됐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일자리를 보호하라’라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일본에서도 점차 ‘낯익은 풍경’이 되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 전역을 마비시켰던 대규모 파업의 핵심 요구도 “정부가 제대로 된 실업대책을 세워라”였다.
보통 경제학자들에게 “최선의 복지가 뭐라고 보느냐”고 물으면 대체로 ‘일자리’라고 대답한다. 일자리는 또 ‘일자리 증가→개인소득 증가→소비촉진→기업투자 증가→일자리 증가’라는 선순환구조의 핵심 고리이기 때문에 전체 경제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이러다 보니 요즘 전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최우선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만들어낼까”로 모아지고 있다. 9일 있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공식 프라임시간대 기자회견도 일자리 창출에 관한 경제학 강의를 방불케 했다. 기자회견의 대부분이 일자리 등 경제 문제에 할애됐다.
중국 정부도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해 유휴노동력을 흡수하는 한편 신규직원 채용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확대하고 있다.
일본도 비정규직에서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자 정치권이 법적 대책을 논의 중이며 지방자치단체들이 임시직 고용규모를 확대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전 세계가 ‘실업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국가별로 구체적인 ‘전과(戰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글로벌 일자리 확보전’에서 한국은 과연 어떤 성과를 올릴지 기대해 본다.
공종식 국제부 차장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