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타격을 입은 국내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국산품 우선구매정책, 해외로의 공장이전 금지, 여러 형태의 수입제한조치는 명백한 보호무역조치다. 또한 자동차 철강 반도체 같은 특정 산업에 대한 정부의 자금 지원도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원칙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보호무역조치가 경쟁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많은 통상전문가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보조금 문제삼아 관세 날벼락
한편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이 국제무역질서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별로 제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하이닉스반도체 사례를 보면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하이닉스는 채권단에 속한 금융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WTO 규정에 따르면 정부보조금이 있을 경우 문제가 되지만 금융기관에서의 지원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하이닉스 제품의 주요 수입국이었던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채권단에 속해 있는 금융기관이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므로 이는 하이닉스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것과 같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이들 국가는 하이닉스반도체에 정부의 보조금을 상쇄하는 관세(상계관세)를 부과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이닉스의 반도체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하이닉스 사례는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금융기관이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할 경우 상계관세 부과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광범위하게 실시되는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이 앞으로 수많은 상계관세 부과를 유발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상계관세 부과가 교역 상대국에 의한 보복 조치와 WTO 제소 등 무역 분쟁으로 이어진다면 국제무역 질서는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금융위기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경제는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위험이 잠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주요국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국의 실물경제에 파급되는 현상을 차단하고 경기를 부양하는 데에만 급급해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보호무역조치에 대해서만 원론 수준에서의 우려를 표명할 뿐이다. 더구나 국제무역질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WTO는 정작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이는 2001년에 출범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아직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아 WTO의 신뢰가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다자 간 교역질서는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쟁소지 또 다른 위험 대비를
우리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과 함께 다자 간 교역체제의 신뢰를 회복시켜 앞으로 전개될 국제무역질서에 대비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경고와 함께 WTO DDA 협상의 빠른 진전을 촉구한 바 있다. 정상회의에서의 촉구는 선언에 그쳤을 뿐 별다른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영국에서 개최될 G20 정상회의에서는 DDA 협상의 최종 타결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도록 구속력 있는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G20 정상회의 이전에 WTO 사무총장이 함께 참여하는 G20 통상장관회의 개최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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