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8>

  • 입력 2009년 2월 26일 14시 24분


[끔찍한 추억]

1967년 SF소설가 필립 K 딕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라는 단편소설을 냈다. 30년 후 '토탈 리콜'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여행을 가지 않고도 여행의 추억을 뇌에 주입받는다. 이 기발한 비즈니스 모델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당신의 추억을 팝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이미 등장한 지 오래다. 버추얼 월드에 옛 서울과 대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놀던 동네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는 3차원 웹 사이트가 큰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박열매 씨가 <당신의 추억을 팝니다>라는 광고 문구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고통의 두 시간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라고 불리는 이 사이트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미성여자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숙대입구, 후암동, 이태원 일대를 놀랍도록 정교하게 재현해 놓은 뒤, 이 지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볼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가격은 '소매가'였다.

열매 씨는 미성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이었다. 온라인 게임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지만, 우연히 방문한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 사이트는 그녀에게 옛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카드로 결제하고 로그인을 하자, 뇌파캡을 착용하라는 메시지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녀는 뇌파를 컨트롤하는 뇌파캡을 쓰고 단단히 조인 후 '시작' 버튼을 눌렀다.

연도와 장소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2015년도' '미성여자고등학교'라고 입력했다. 그러자 두 대의 카메라가 그녀 앞에 놓인 스크린 벽면에 2015년 서울 용산구 남산 자락을 통째로 옮겨다 주었다. 뇌파캡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신호들이 머리로 흘러들어갔고, 열매 씨는 순식간에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추억에 몰입했다.

그들의 복원 기술은 놀랍기만 했다. '미성여자고등학교'라고 적힌 교문에서부터 건물 벽에 큼지막하게 박힌 '희망, 성실, 진리'라는 교훈, 운동장의 느티나무 한 그루, 동네 숍들의 간판과 지나다니는 마을버스, 심지어 전봇대까지도 정확히 재현해 놓았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으로 엄청나게 큰돈을 번 회사가 자신들의 인공위성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한 것이다. 그들은 전국 700여 개 고등학교에 대한 추억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열매 씨는 해방촌길을 천천히 걸으며 떡볶이를 파는 아줌마도 구경하고 구멍가게도 들어가고 골목길 사이사이를 이유 없이 지나가기도 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학교로 들어가서 운동장을 달려도 보고, 짝사랑했던 동네 친구 집 앞을 서성거려도 보고, 4년간 살았던 집에서부터 단짝 친구 집까지 걸어도 보았다. 손을 뻗으면 벽에 붙은 '과외 광고'도 만질 수 있었다. 골목길이 너무 좁다랗게 느껴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2015년 용산 그대로였다.

그 후로 종종 열매 씨는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 사이트를 찾았다. 외동딸이 학교에 간 후 거실에서,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를 기다리는 동안 휴게실에서, 그리고 남편과 말다툼을 한 후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그녀는 '동네 한 바퀴'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사고가 터진 날도 열매 씨는 외동딸과 남편이 잠든 후 혼자 TV를 보다가 새벽 2시 무렵 뇌파캡을 썼다. 그날따라 뇌파캡 끈에 달린 버튼이 제대로 잠기지 않아서 두 번 질끈 동여맨 후에야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에 접속할 수 있었다. 눈앞엔 이내 저녁 무렵의 해방촌길이 펼쳐졌다.

좁다란 골목길을 이곳저곳 서성일 때, 멀리서 여자 세 명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똑같은 모양의 검은 그림자들이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날씬한 여성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이트를 여러 번 접속했어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림자와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림자가 열매 씨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근처에 가까운 지하철역이 어디에요?"

"어? 새로운 기능인가? 내게 말을 거네."

열매 씨는 신기한 듯 멈춰 서서 그림자들을 살폈다. 말을 붙인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갑자기 정수리 부근에 강한 전자기파가 흐르는 듯 싶더니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손에 경련이 일었다. 운동조절을 관장하는 두정엽 부근의 뇌파캡 전극에서 강한 신호가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열매 씨는 손을 들어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공포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잠깐만 와봐."

골목길 저편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 아래 채팅 화면에는 'cnrrnakstp'라는 독해 불능 문자가 찍혀 있었다.

그림자가 열매 씨 아바타의 복부를 가격하자, 뇌파캡을 통해 대뇌를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이번엔 뒤에 있던 다른 그림자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묵직한 고통이 대뇌를 울렸다. 열매 씨 아바타가 길바닥에 주저앉자, 그림자 셋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끌고 갔다. 그림자의 실루엣은 여성이었지만 행동은 영락없이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림자 셋은 아침 조깅을 하듯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가했다. 그림자의 몸이 열매 씨의 아바타에 닿을 때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열매 씨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뇌파캡을 벗고 싶었지만 강한 전자파가 그녀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열매 씨는 실신 상태에 이르렀다. 아무도 돌봐주지 못한 간질 발작 환자처럼, 두세 차례 심한 구토로 나온 시큼한 토악물들이 거실 바닥에 흥건했다. 그녀는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거실바닥에 쓰러진 열매 씨를 처음 발견한 이는 외동딸이었다. 열네 살 외동딸은 그제야 뒤늦은 비명을 질렀고 남편은 황급히 열매 씨를 차에 실은 뒤 인근 병원으로 달렸다. 외동딸도 허둥지둥 잠옷 바람으로 함께 차에 탔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열매 씨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운동영역과 감각영역, 편도체 등 대뇌 전반에 걸쳐 과도한 전기 자극이 가해졌으며, 극심한 고통 속에 장시간 발작을 일으킨 것이 사인이었다. 그녀의 대뇌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고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극한의 공포감을 계속 되뇌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외동딸의 고집으로 화장 전 정밀부검을 했을 때, 열매 씨의 뇌는 강한 전자기장 자극으로 인해 거의 망가져 있었다.

외동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건 당시 거실 컴퓨터가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 사이트에 접속 중이었음을 확인하고 이 사이트를 만든 '홈타운 컴퍼니'에 연락을 취했다. '홈타운 컴퍼니' 기술이사에 따르면, '동네 한 바퀴' 사이트에는 고객이 추억에 쉽게 빠져들도록 유도하기 위해 뇌파캡을 통해 전두엽과 측두엽 부근, 두정엽 근처에 전기장과 자기장을 가하는 기능이 있었다. 이들 뇌영역은 특정주파수의 전자기파를 가하면 기억인출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새벽, 사이트의 프로그램 운영 로그 파일에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강도와 주파수의 전자기파가 고객의 뇌파캡으로 무려 48분이나 주입된 기록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해킹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이 사이트에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신체 접촉을 하는 기능이 없었다. 사이버 테러를 위해 프로그램에 새 기능을 추가할 정도로 범인들은 컴퓨터에 매우 능숙했다.

사이트 로그 파일에서 침입자들의 아이디가 발견되었다. 축구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 하지만 이 아이디들은 범인을 찾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경찰은 '불량 청소년들의 과격한 장난' 쯤으로 단정 짓고, 관련 범죄기록을 바탕으로 추적 조사를 했다. 버추얼 월드 특히 팀원들끼리 긴밀하게 채팅을 통해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임에서 언어폭력이나 사이버 구타 사건 관련자를 제법 많이 잡아들였지만, 열매 씨 경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생들은 앵거 클리닉으로 보내졌고 성인들은 즉결 처분을 받았다. 결국 범인검거에는 실패했다.

그 고요한 새벽, 미성여고 졸업생 박열매 씨는 어느 '동네 한 바퀴' 사이트에서 '살인의 추억'을 소매가로 구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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