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자리만 밟으려는 물나라 정권
쫄딱 망한 시집이 좁아터진 며느리 집과 맞바꿔 살게 된 장면은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기시감)를 일으켰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현실에선 더한 일도 얼마든지 있다. 10년간 정권을 잃고 헤매던 한나라당이 마침내 청와대를 차지하고 과반수 여당이 된 것도 평범한 드라마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현실 속의 국민드라마는 거기서 끝났다. 한나라당은 야수본능 변신은커녕 마른자리만 밟고 다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고갈된 불능정당 물나라당이 됐고, 대통령은 오는 기회마다 놓쳐 1년이 넘도록 옥동자를 낳지 못한다. 집권 전엔 공공부문 개혁부터 시범을 보일 것처럼 서슬 퍼렇게 칼을 갈더니, 어느새 공무원 눈치만 보는 신세가 돼서는 애먼 민간기업에 대고 투자하라며 팔을 비튼다. 오죽하면 ‘현 정부가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점’을 물은 매일경제 조사에서 ‘과감한 정책추진’이 가장 많았겠나.
배 아픈 것도 못 참지만 답답한 건 더 못 참는 사람이 우리 국민이다. 시청자들이 왜 욕을 하면서도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지 아는가. 액션이 있어서다. 나중에 방송 징계를 받더라도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화끈한 데 열광하는 다이내믹한 국민성과 딱 맞는다. 1930년대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집권 내내 헌법을 파괴하는 독재자라고 공격받았다. 취임 첫 100일간 대통령 의도대로 15건의 법안을 통과시키는 건 의회에 대한 압박 없이 불가능하다. 첫 법안인 긴급은행법은 취임 엿새째인 1933년 3월 9일 정오 하원에 첫선을 보이고선 수정 없이 만장일치 통과돼 상원을 거쳐 오후 8시 반 대통령 서명을 끝냈다. 정부의 임금과 가격통제를 강제한 국가부흥청(NRA)은 1936년 위헌판정까지 받았다. 중요한 건 결과다. 어쨌든 루스벨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대화와 타협, 초당파적 협력과 국민대통합. 말은 옳다. 그러나 현실에서, 더구나 경제위기를 지나 경제전쟁으로 넘어간 현재 그런 나라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초당파 정치를 맹세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예산안 통과를 위해 야당의 의사진행방해를 피하는 패스트 트랙을 강구하고 있다는 게 워싱턴포스트 보도다.
확실하게 하든지, 엎어지든지
지금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마저 뒤집히는 “거꾸로 돌아 뛰어!” 상황이다. 대화와 타협 없이 일당독재로 경제성장에 매진해온 중국은 유능한 정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임했던 미국은 오바마 취임 뒤 ‘민주주의가 아니면 어떠리’ 주의가 됐다. 그런 미국을 보는 지구촌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정이 떨어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민주주의란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가치일까. 당장 일자리가 없어 길바닥에 나앉을 판인데도?
노무현 정권은 그래도 용감했다.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라서 그렇지, 대못은 곳곳에 확실히 박아뒀다. 물나라당 집권세력은 새 길을 닦기는커녕 저희들끼리 네 탓 타령만 하면서 대못 빼는 일도 제대로 못한다. 좌절된 주요 법안 통과를 위해 이달 말 국회를 열어야 한다지만 야당이 싫다 하면 또 주저앉을 게 뻔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을 만큼 너무나 유별난 우리나라다. 누군가 불꽃만 당겨주면 무섭게 타오를 국민 에너지가 지금 쓸 데가 없어 막장 드라마에나 쏠리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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