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라이징 스타’의 추락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2003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의 스타는 정동영이었다.

실제 CNN 앵커 출신의 한 사회자는 정동영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특사를 한국의 ‘라이징 스타(떠오르는 별)’라고 소개했다. 이제 막 새 정권이 들어선 한국의 실세에 서방국가의 관심이 쏟아졌다. 정 특사는 포럼에 참석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일대일 회담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파리특파원이었던 기자는 다보스포럼 취재차 현장에 갔다. 기자와 만난 정 특사는 ‘10년 전 출입기자 동기’라며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대략 10년 전, 연조 차이는 컸지만 나와 정동영 MBC 기자는 함께 통일원(통일부의 전신)에 출입했었다.

그러자 한국에서 정 특사를 동행취재 온 기자가 내게 물었다. “그럼, 박 형은 대체 10년 동안 뭐 한 거요?” 정 특사가 방송기자에서 한국의 실세로 부상하는 동안 ‘출입기자 동기’인 나는 뭘 했느냐는 농이었다.

사실 그가 ‘떠오르는 별’로 솟는 데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96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에게 영입된 후 전북 전주 덕진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를 했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와 경선 드라마를 연출해 새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된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통일부 장관을 맡아 ‘대권수업’을 했고 두 번이나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정동영의 신화’는 거기까지였다.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전업한 뒤 11년 만에 여당 대선후보가 된 그는 이명박 후보에게 사상 최대 표차로 참패했다. 이어 4개월 만에 출마한 지난해 4월 총선에서도 떨어졌다.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전주 덕진 재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당내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정동영의 가파른 추락은 과거 그의 고속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인의 첫 번째 덕목은 자기희생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더 자기희생을 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나를 다스릴 권력을 주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43세에 금배지를 단 뒤 승승장구해 온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돌이켜보면 전체 구도가 ‘이명박 대 노무현’ 대결로 흐른 지난 대선에서 그의 패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노무현 정권의 ‘골든보이’이자 여당 최대 계파를 등에 업고 대선후보에 오른 그에게는 ‘감동’이 부족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에게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몸을 던진 이미지는 있지 않았던가. 그냥 패배도 아니고 사상 최대 표차로 진 데는 정동영 개인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여당 대선후보 출신이 참패 4개월 만에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그것도 서울에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예상됐던 지역구(동작을)에 나선 것은. 양지만을 찾은 그는 애초부터 울산 동구라는 당선이 보장된 지역구를 던지고 올라온 정몽준 후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시 1년 만이다. 이번에는 더욱 안전한 지역구를 찾아 U턴하려는 정동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전주 덕진 유권자들도 보는 눈이 있는 터에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당선된다 해도 금배지 하나보다 훨씬 더 큰 걸 잃을 게 뻔하다. 그의 나이 이제 56세. 조급하게 양지만을 찾아다니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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