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WBC 준우승은 프로야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야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1년 대통령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정서와 여가 선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프로스포츠 한번 해봐라”고 지시한 것을 계기로 출범했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그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3S(스크린, 섹스, 스포츠) 정책’을 동원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야구가 국민 모두에게 이렇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포츠가 국민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외환위기 때 여자프로골퍼 박세리의 맨발 투혼에서 이미 실감했다. 골프용어나 룰도 모르는 사람조차 행복했고 위로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6일 야구팀을 청와대로 불러 격려했다. 한나라당은 홈페이지에 김인식 감독과 봉중근 추신수 선수를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한승수 국무총리로 변신시킨 ‘당정청(黨政靑) 드림팀이 되자’는 패러디물까지 올렸다. 당정청이 한국 야구팀의 ‘반의 반’만이라도 감동을 줬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구팀의 성공 비결을 배워야 한다.
프로스포츠는 철저히 능력 중심의 세계다. 선수들의 몸값은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좌파들의 최고 가치인 평등은 설 땅이 없다. WBC 한국팀은 이승엽 박찬호 등 A급 선수들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최강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감독이나 코치의 지연 학연 같은 사연(私緣)에 좌우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와 내각이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최고 인재들로 구성됐는지 돌아볼 일이다.
한국팀의 성공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 김 감독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그의 리더십의 요체로 선수에 대한 신뢰, 탁월한 용인술, 인내, 겸손, 긍정적 사고, 실용주의, 공평무사(公平無私) 등을 꼽는다. 정치지도자들이 진심으로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김 감독은 평소 어눌한 편이지만 “나라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 “위대한 도전” 같은 촌철살인의 말로 선수들의 애국심과 열정, 팀워크를 자극하고 국민을 감동시켰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많은 말을 했지만 국민에게 큰 감동을 남긴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도자는 소소한 것을 챙기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불필요한 간섭은 줄일수록 좋다. 야구팀과 김 선수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이 세계 최고가 되려면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치권에는 지금 ‘박연차 한파’로 ‘불안한 3월’에 이은 ‘잔인한 4월’이 닥쳐오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국민은 안다. 절망의 한국 정치가 야구팀과 김 선수의 절반만 따라가도 세상이 좋아질 것임을.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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