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치로는 우리나라에선 영웅은 고사하고 천재 대접조차 받지 못한다. 그 유명한 ‘30년 망언’ 때문이다. “앞으로 30년간 일본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해주겠다.” 3년 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이 발언이 나오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뭇매를 날렸다. 한일전은 국내 언론과 이치로의 대리전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치명적인 오해다. 이치로의 실제 발언은 “앞으로 30년간 일본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열심히 하겠다”였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자신에 대한 다짐이 아시아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치로는 지난달 일본의 2회 연속 우승으로 끝난 제2회 WBC 때도 공공의 적이었다. 사람 좋은 김인식 감독조차 “혼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전에서 2승을 거둔 봉중근은 이치로를 밟고 영웅이 됐다. 이치로를 연속 땅볼로 잠재우고 ‘입 치료’를 했을 때는 의사(醫師) 닥터 봉으로, 이치로에게 날카로운 1루 견제를 해 ‘위치로’ 보냈을 때는 항일 의사(義士)로 추앙받았다.
반면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임창용은 이치로에 비하면 칙사 대접을 받았다. 임창용은 3-3으로 맞선 10회 초 2사 2, 3루에서 하필이면 이치로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임창용이 패전투수가 됐기에 감수해야 할 비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포츠에서 패배는 병가지상사. 그날 한국 대표팀은 옥에 티를 남겼다. 임창용의 볼 배합에 대한 논란이 문제였다. 김 감독이 내외신 기자들에게 말을 꺼낸 게 첫 실수였다. 좋은 공을 주지 마라는 감독의 사인을 못 본 것인지, 실투인지, 아니면 항명인지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 감독과 임창용, 포수 강민호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인을 못 봤고, 유인구를 던졌는데 컨트롤이 안 됐다는 ‘사실’만 나왔을 뿐이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필자도 한때 항명을 의심했다. 임창용이 공을 던지기 전 강민호의 글러브는 스트라이크존 가운데 약간 높은 곳에 고정돼 있었다.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 투 볼로 유리했다. 이전까지 7개를 던진 임창용의 공은 모두 코너워크가 됐지만 그때는 유난히 가운데로 쏠렸다. 감독의 사인이 볼 카운트가 변함에 따라 계속 나왔는지도 묻고 싶었다.
어쨌든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이치로의 자신과의 약속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필자는 체육기자이기 이전에 스포츠 팬. 한국의 ‘위대한 도전’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이치로에게도 경의를 보낸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