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권을 옥죄기 시작하면서 여의도 정가에선 엉뚱하게 검찰이나 정치자금법을 탓하는 볼멘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 정권을 노린 표적 사정’이나 ‘친박(친박근혜)계 죽이기’, ‘서초동발(發) PK(부산·경남) 정계개편 의도’라고 검찰을 매도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국회의원은 차제에 정치자금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정치자금법 개정 문제가 논의될 것 같다.
한 재선 의원은 “‘정치는 밥’이란 말이 있듯이 모든 정치 행위에는 돈이 필요하다”며 “요즘의 검찰 수사는 자기 돈 없는 사람은 정치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비난했다. 한 386 의원은 박 회장 사건으로 구속된 민주당 이광재 의원의 사례를 거론하며 “기업인에게 용돈 좀 받았다고 구속된다면 우리나라 국회도 미국 의회처럼 돈 많은 전문직인 변호사들이 금배지를 독점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중진 의원은 “비자금이 용인되던 옛날이 그립다”며 “예전엔 여야가 서로 ‘통치자금’도 나눠 썼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2004년 17대 총선 직전 여야가 합의한 것이다. 여야는 이른바 ‘오세훈 법’을 토대로 후원회 행사를 금지하고 당 차원의 모금을 원천봉쇄했다. 국회의원이 돈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유권자로부터 소액의 후원금을 받는 것만 남겨 놨다. 원외 인사나 정치 초년병들은 아예 후원금도 모을 수 없게 했다. 법조계와 언론계 등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여야는 한목소리로 “개혁입법”이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정치권에 돈이 들어올 입구가 거의 다 막히면서 음성적이고 불법적인 돈거래는 한층 기승을 부리게 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행 정치자금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법이라는 진단이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정치자금법 개정 당위론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
‘검은돈’에 얽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치권은 검찰을 탓하지만 검찰은 국회에서 만든 법을 집행할 따름이다. 정치인들이 그런 검찰을 비난하는 것이나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만든 법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무엇보다 그런 법을 만든 이유는 정치권의 검은돈에 쏠린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했기 때문 아닌가. 지금은 정치권이 얼마나 맑아졌는지 먼저 되돌아볼 일이다.
조수진 정치부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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