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65>

  • 입력 2009년 4월 6일 13시 32분


세상 일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경우는 매우 적다. 슬프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볼테르가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였다.

"스릴러 영화나 추리 소설을 보면, 한 조직의 구성원들이 죽어나갈 때 살인범은 그 내부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이 줄줄이 살해당하면 담임교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고, 환자들이 희생될 땐 당연히 담당의사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법입니다. 어떻습니까, 자수할 의향은 없으신가요?"

노원장은 즉답을 피하고 볼테르의 진료 차트를 꺼내 폈다. 볼테르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2시 25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작하시죠. 오늘 방문종 그 녀석 얼굴 보긴 틀린 것 같습니다. 3시 반부터 글라슈트를 최종 점검해야 합니다. 16강전은 밤 9시부터 시작되고요. 지금 와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정말 원장님께 할 말 못할 말 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노원장이십니다. 석 달 전엔 넷이었는데 결국 저 혼자만 치료를 마치는군요. 다 같이 클리닉을 끝내면 좋았을 것을. 허나 어떤 일이든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요."

볼테르는 작별인사를 마치고 떠날 분위기를 잡았다. 노원장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치료를 마쳤다고 누가 진단을 내렸습니까?"

"그거야 석 달 꾸준히 상담치료를 받으면 코스를 마치게 된다고 원장님이 직접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배틀원 2049' 준비로 무척 바빴지만 단 한 번도 약속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노원장이 차트를 덮고 볼테르를 쳐다보았다.

"두 달 더 상담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두, 두 달!"

볼테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노원장의 멱살이라도 움켜쥘 기세였다. 그러나 길게 한숨을 연거푸 내쉰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 이 순간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그에게 불리한가를 알아차린 것이다. 주먹이라도 날렸다가는 치료 기간이 두 달 아니라 2년으로 늘어날 지도 모른다.

"이유가 뭡니까?"

"아직 화를 다스리는 능력이 조금 부족합니다. 두 달만 더 상담치료를 하면 완쾌될 겁니다."

"개수작!"

볼테르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괜히 이러는 걸 모를 줄 압니까?"

"괜히…… 이러다니요?"

"<보노보> 방송국에서 폭발물이 터지던 날, 그 좌담회 기억하시죠? '배틀원'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노원장님 의견을 제가 계속 반박했다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 '배틀원 2049'에서 글라슈트가 16강을 지나 8강 4강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앙심을 품은 것 아니냐고요?"

"사사로운 불만으로 환자를 진료하진 않습니다."

노원장이 단칼에 잘랐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시간입니다. 팀원들을 불러 인터뷰해보십시오. 지난 석 달 동안 저는 단 한 차례도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순한 양이었다고요."

"그게 더 문젭니다. 화를 내는 횟수와 강도를 서서히 줄여나갔다면 치료를 끝내겠지만, 자주 화를 내고 기물을 파손하던 사람이 성인(聖人)처럼 돌변했다면, 그건 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숨은 겁니다. 언제라도 계기만 생기면 다시 폭발하죠. 이제부터 두 달 동안은 숨어 있는 화를 끄집어내서 다스리는 치료를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오십시오."

"원장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지금부터 배틀원이 끝날 때까지는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볼테르가 무릎을 탁 치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렇게 하지요. 두 달 상담치료를 더 받겠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배틀원이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땐 두 달 아니라 넉 달 아니 여덟 달이라도 치료를 받겠습니다."

볼테르로서는 최대한 양보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노원장은 처음 정한 뜻을 바꾸지 않았다.

"치료의 시작과 끝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정하는 법입니다. 일주일 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날 클리닉에 나오지 않으면, '배틀원 2049' 주최 측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리 하면 글라슈트의 경기 출전 자체가 어려울 겁니다. 선택은 최 교수님이 하세요. 자, 어쩌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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