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은 “이미 다 꺼진 불을 다시 헤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제2, 제3의 촛불시위나 광우병 파동의 반복을 막고, 한국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이런 작업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광우병 파동은 단순한 시민운동이 아니라 반(反)대한민국적 정서의 총합(總合)을 기반으로 전개됐다”고 진단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을 타결한 것은 1년 전 이맘때인 작년 4월 18일이었다. 2주일 뒤인 5월 2일 시작된 광우병 시위는 8월 중순까지 석 달 이상 이어졌다. 서울 도심 등 곳곳에서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고 유무형의 국가적 손실도 컸다. ‘미국산 쇠고기=인간광우병’이라는 시위 선동세력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런 희생도 불가피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모두 알다시피 그 촛불은 ‘거짓의 촛불’이었다.
정부의 협상 과정이 그리 깔끔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방송 신문 인터넷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왜곡된 정보로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고 나라를 뒤흔든 일부 세력의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10대들을 부추겨 “미국 쇠고기는 미친 소”, “나는 아직 죽기 싫어요”, “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게 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호도한 것은 또 어떤가.
광우병 소동 1년을 맞은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다시는 그런 대(對)국민 사기극이 재연되지 않을 만큼 시민의식이 성숙하고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을까. 불행히도 이런 질문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봄과 여름 국민을 선동한 세력이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조작 방송의 극치를 보여준 MBC PD수첩 제작진은 지금도 ‘언론 자유’를 입에 올린다. ‘정연주의 질곡’을 벗어난 KBS가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일부 방송 및 인터넷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사법부는 광우병 시위대의 불법 행위에 강력한 응징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폴 존슨은 ‘지식인들’이란 책에서 루소, 마르크스, 브레히트, 사르트르, 촘스키 등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서구 지식인 10여 명의 위선적 행태를 파헤쳤다. 존슨은 “인간이란 기만당하기 쉽고 인정하기 싫은 증거를 거부하려 한다”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지식인일수록 진실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경향이 있다”고 썼다. 요즘 우리 현실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확신의 편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시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보고 싶은 현실’을 위해 의도적으로 상황을 왜곡하거나 선동에 휘둘리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광우병 1년’이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큰 교훈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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