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성공 사례를 살펴보면 디자이너의 역량보다 경영자의 디자인적 판단력이 더 중요했던 경우가 적지 않다. 디자이너는 작게는 마케팅 전략의 테두리 안에서, 크게는 기업의 이념과 경영철학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벤츠의 중후한 디자인이나 애플의 미래주의적인 디자인은 기업이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경영자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아주 높은 사례가 세계적 불황 속에서도 성공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원심분리기식 청소기메이커 ‘다이슨’이다. 최고경영자(CEO)인 제임스 다이슨 씨(61)는 영국의 왕립예술대학(RCA)을 졸업한 디자이너 출신이다.
다이슨 CEO는 발명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다 독립한 뒤 원예작업도구 등을 발명한 경력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진공청소기의 종이 필터를 교체하다 날리는 먼지에 분통이 터진 다이슨 CEO는 필터가 없고 흡입력이 줄어들지 않는 청소기를 만들기로 작정한다. 1979년 마분지와 비닐테이프를 이용해 첫 모형을 만든 뒤 5년간 시작품 5000여 개를 만드는 시행착오 끝에 먼지를 공기와 원심 분리해 깨끗한 공기를 배출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1993년 다이슨사(社)를 설립해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자 이 청소기는 2년 만에 영국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다이슨 제품은 2006년 말 기준으로 세계 각국에서 2400만 대 이상 팔렸다.
다이슨 청소기를 보면 디자인에는 발명의 성격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폭넓은 지식과 관찰력을 기반으로 한 발명은 디자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런 발명은 주변의 모든 것을 소홀히 보지 않는 애정과 환경을 바꾸겠다는 적극성을 먹고 자란다. 2000년 국제 우수디자인상(IDEA)에서 은상을 받은 디자이너 김영세 씨의 ‘잠금장치가 있는 지퍼’나 미국의 주방용품 브랜드인 옥소가 류머티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서 개발한 제품은 모두 일종의 발명이며 주변에 대한 애정과 적극성에서 나온 것이다. 다이슨 CEO도 그랬다. 필터청소기의 불편함에 짜증을 내던 그는 ‘모두가 불만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 게 원점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대개 기업에서는 심미적인 것은 디자이너에게, 그리고 기능적인 것은 엔지니어에게 맡긴다. 그러나 다이슨 CEO는 이 둘은 일체화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 업무 모두를 디자인실에서 일원화해 담당하게 했다. 그래서 다이슨사에는 연구개발(R&D)에 디자인을 더해 ‘RDD’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RDD에는 무조건 매출액의 20%를 투자한다.
이 회사의 특이한 점은 디자인실에 디자이너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디자인실뿐 아니라 회사 전체에 디자이너가 한 명도 없다. 그렇다고 협력관계에 있는 외부 디자인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디자인을 핵심 경영전략으로 삼고 있는 기업으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비밀은 입사 후 엔지니어들에게 회사 자체 프로그램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것이다. 400여 명의 엔지니어가 엔지니어링 업무와 병행해 디자인 능력(미술이 아닌)을 높여 나간다. 다이슨사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제품개발 초기 단계부터 모든 업무에 디자인이 통합돼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있다.
다이슨 CEO가 추구하는 철학도 다이슨 디자인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다이슨사에서는 절대 유행을 좇는 디자인은 하지 않는다. 불경기라 해도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바로 이거다!’ 싶은 상품이 있으면 지갑을 연다고 다이슨사는 믿고 있다. 청소기와 같은 생활용품에서 디자인은 기능과 편리성, 촉감, 소음 등 생활가치의 종합이라고 봤다.
앞으로 다이슨 성공신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성공에는 디자인이 있고 그 디자인이 단순히 유행을 좇는 외관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짚어내는 세심한 관찰력, 무엇이 디자인이고 무엇이 엔지니어링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통합된 제품 설계, 군더더기 없이 핵심기능만을 강조한 기능미, 이런 다이슨 디자인의 핵심요소들은 제임스 다이슨이라는 CEO의 디자인 역량에서 나온 것이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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