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한국HSBC은행은 20일부터 점포 문을 오전 9시에 열기로 했다. 홀로 남은 SC제일은행도 대세를 따르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눈치다. 두 은행의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금융당국의 파워를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김종창 원장이 “봉사하는 금감원이 되겠다”고 아무리 자세를 낮춰도 금융회사 사람들이 금감원 청사에 들어서면 주눅이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평소엔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간섭하던 금융당국이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면서 스타일을 구겼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번지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금융당국의 힘은 더 세졌다. 채권단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대기업들도 채권단을 사실상 휘하에 거느린 금감원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선 건설 해운업체들의 자금흐름과 수익구조 같은 알짜 정보는 모두 금감원의 수중에 들어갔다. 45개 주채무계열에 대한 평가가 끝나는 이달 말쯤이면 주요 그룹의 곳간 사정도 훤히 꿰뚫게 될 것이다.
정확한 진단은 올바른 처방을 위한 기본 전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위기국면에서 최신 고급 정보가 당국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적극 권장해야 할 일이다. 경제시스템 안정의 공동 책임을 진 기관은 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시장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가 있다. 금융시장의 최종 대부자로서 통화신용정책을 결정하는 한국은행, 부실자산을 매입해 실물경제의 붕괴를 막아야 하는 자산관리공사(캠코), 금융회사가 도산하면 소방수 역할을 해야 하는 예금보험공사가 그런 곳이다.
그런데도 금감원은 정보 제공에 인색하다. 지난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의 부실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저축은행이 PF 대출을 해준 899개 사업장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했지만 캠코에는 ‘악화 우려’로 분류된 일부 사업장의 정보만 건넸을 뿐 나머지는 내주지 않았다. 캠코가 전체 상황을 모르고 PF 채권을 사들였다가 손해가 나면 그 부담은 국민의 몫이다. 한은이 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평가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금감원은 ‘가정을 전제로 한 조사여서 공유할 수 없다’는 모호한 논리로 거절했다.
금융회사 조사권을 둘러싼 금감원과 한은의 해묵은 갈등은 밥그릇 다툼의 성격도 있지만 금감원의 과도한 정보독점욕이 초래한 측면이 더 크다. 한동안 잠잠했던 한은법 개정 논의가 국회에서 다시 돌출한 것은 금융정보의 소통 부재 현상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외환위기 때 겪은 것처럼 시장이 불안하고 구조조정 대상이 늘어날수록 ‘금융 권력’은 더 커질 것이다.
당장의 정보와 권력에 도취돼 넓게 보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몽땅 내놓아야 하는 사태가 닥칠지도 모른다. 금감원이 정보 창고의 문을 여는 것은 은행 영업시간 변경과는 차원이 다른 경제위기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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