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병기]외환위기가 주는 착각

  • 입력 2009년 4월 22일 02시 57분


“언론이 너무 겁을 줬잖아. 외환위기 정도는 아니잖아.”

요즘 사석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주식시장과 일부 부동산시장에 봄바람이 불면서 더 자주 듣는다. 작년 겨울 “반 토막 난 펀드를 언제 환매하면 좋으냐”고 집요하게 묻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증권사 객장을 다시 찾는다. 한일 야구 5차전으로 한 달, 박연차와 장자연 리스트로 또 한 달을 보낸 사이 나타난 변화다. 공포에 짓눌려 있던 시장에 탐욕의 기운이 퍼져가고 있다. 코스닥에 온갖 테마주가 횡행한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놓친 대박 찬스에 대한 학습효과다.

외환위기의 극복은 중요한 통찰력과 자신감을 준 경험이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외워 경제 및 투자관련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낭패를 보기 쉽다. 그런 ‘착시(錯視)’에 빠질 소지가 큰 집단은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에 다니는 화이트칼라, 대기업의 생산직 근로자, 해고 걱정 없는 철밥통 등 중산층 봉급생활자들이다. 위기에서 상대적으로 비켜나 있어 체감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고환율로 인한 수출의 상대적인 선전은 더 큰 착시를 부른다. 수십만 명의 넥타이 부대가 일시에 거리로 내몰렸던 10여 년 전과 큰 차이다.

이번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은 중소업체와 주택전문 건설회사, 자영업자, 비정규직 근로자, 일용직 근로자, 사회 초년생들이다. 10년 전 위기는 ‘중산층의 붕괴’를 불렀고 이번엔 ‘빈곤의 심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통계를 볼 필요도 없다. 지방공단이나 건설현장, 도시 외곽의 식당에만 가 봐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만한 극적인 사건이 없어서 그렇지 이들은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중산층 봉급생활자들은 ‘봉급 삭감’ 정도의 대가만 지불하고 이번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병의 치유 과정이 다르다. 외환위기가 급성 맹장염이라면 이번은 수술을 해도 자꾸 재발하는 폐암이다. 격렬한 고통과 만성적인 통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작년 9월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부도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일부 악성 종양을 제거하고 막대한 양의 진통제를 투입했다. 금융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돼 실물경제도 같이 무너지는 최악의 파국을 막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을 쳐 한국의 외환, 주식, 부동산 시장에 쓰나미가 밀어닥칠지 모른다. 미국의 신용카드나 상업용 부동산발 2차 금융 위기, 영국이나 동유럽발 위기 등 시한폭탄이 곳곳에 널려 있다.

금융시장이 안정돼도 갈 길이 멀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달러 가치 폭락과 슈퍼 인플레이션이다. 얼어붙은 경기가 풀리면서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앞뒤 가리지 않고 뿌려놓은 기름(돈)에 불이 붙으면 전 세계 경제가 화염에 휩싸일 수 있다. 작년 봄 체감했듯이 달러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할 때 한국은 최대 피해자가 되기 쉽다. 선진국들이 재정적자를 잘 관리하고 달러 폭락을 막더라도 저성장 시대가 올 수 있다.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면 수년간 지속될 저성장을 수년 이상 견뎌낼 곳은 많지 않다. 결국 미뤄졌던 대규모 생산설비 및 인력구조조정이 다시 시작된다. 그 칼날은 중산층 봉급생활자를 겨눌 것이다. 그때쯤이면 “도대체 이번 위기는 언제 끝나냐”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이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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