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3>

  • 입력 2009년 4월 30일 11시 38분


[악몽과 맞서다]

인간은 본디 낮의 동물이다.

낮에는 생존에 필요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낮에 소진한 기력을 잠을 통해 충전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우리 몸의 송과선은 멜라토닌을 분비하면서 스스로 잠잘 채비를 갖춘다. 밤은 아늑한 잠의 세계다. 후회 없이 하루를 보낸 모든 이의 밤은 잠으로 고요하다.

1959년 미국의 DJ 피너 트립은 201시간 동안 그러니까 무려 8일 넘게 깨어있음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은 사람'으로 기록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난폭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욕지거리를 하고, 환영과 환청을 경험했다. 심지어 '누군가 자기 음식에 약을 탔다'고 믿는 망상 증세를 보였으며, 느닷없이 차도에 뛰어드는 이상 행동도 했다. 잠의 세계로 침잠하지 못한 인간의 밤은 위험하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전쟁에도 이용됐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해 왔을 때,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공격의 임박함을 알리는 거대한 불을 활활 사르면서, 밤새도록 스피커를 통해 탱고음악과 시계 종소리를 흘려 독일군을 압박했다. 독일군들은 잠도 제대로 못 이룬 채 참호 속에서 지쳐갔다. 몇몇 독일군은 동료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이상 증세를 보였다. 잠의 세계로 침잠하지 못한 인간들의 밤은 더없이 처참하다.

꿈은 '잠의 세계가 선사하는 선물'이다.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오늘 하루 얻은 정보를 차곡차곡 정리한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중요한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것이다. 꿈이란 '기억들이 각기 다른 영역의 뇌 속 저장고에 들어갈 때 그 기억이 흘깃 보이는 것'이다. 혹은 불필요한 기억들이 휴지통에 던져지기 전에 찰나적으로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꿈을 통해 어제의 추억을 되뇌고, 오늘의 경험을 정리하며, 내일의 숙제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골프 황제 잭 니클로스는 슬럼프의 해결책을 꿈에서 찾았다. 어느 날 꿈에서 원하는 대로 골프 공이 잘 맞아서 살펴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클럽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1869년 어느 날 원소를 배열하는 문제로 씨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 꿈에서 주기율표를 봤다. 깨어나자마자 꿈에서 본 표를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주기율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록그룹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는 꿈에서 들은 선율에 가사를 붙여 '예스터데이(Yesterday)'를 만들었다. 이처럼 즐거운 꿈은 속절없이 하루를 보낸 이들에게 소중한 선물이다.

하지만 악몽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악몽에 시달리느라 땀에 흠뻑 젖고, 온갖 고통스런 상황으로 체력을 소진하며, 때론 잠에서 깬 후 벌떡 일어나서 의미 없는 말을 마구 뱉거나 돌아다닌다. 악몽은 깬 후에도 한 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한다.

2049년 서울특별시에선 악몽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불면에 시달리는 특별시민이 크게 증가한 탓이다. 그 중에서도 '한밤중의 돌연사'가 악몽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2040년 '한밤중의 돌연사'가 사망원인 10위 안에 들면서, 그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악몽이나 야경증으로 인해 신경 계통의 활동이 강화되고 심장 박동이 갑자기 정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꿈을 꾸는 렘수면(REM sleep, 수면 중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Rapid Eye Movement' 상태) 상태에서는 심장 박동과 호흡이 빨라지고 불규칙해진다. 더욱이 악몽은 뚜렷한 심리적 자극을 유발해 이따금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수면장애가 가장 심각한 정신질환 중 하나로 인정되면서, 정신과 의사와 뇌공학자를 중심으로 악몽을 줄이고 단꿈을 꾸게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신경과학자이자 SAIST 차세대 로봇연구센터 노민선 역시 이 분야에서 주목받는 신진연구자였다.

노민선이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위치한 스탠포드대학 수면연구소에서 연구한 주제가 바로 '렘수면 행동장애'다. 이 질병에 걸리면, 악몽이 실제처럼 일어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렘수면(REM sleep)에서는 안구 운동과 호흡기 근육을 제외하고는 모든 근육활동이 멈추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꿈은 꾸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가위에 눌리는 경험을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신경을 관장하는 대뇌 시상하부에 문제가 생기면, 근육 움직임이 자유로워져 꿈을 꾸는 동안 현실의 육체도 꿈에 시달리며 움직인다.

꿈을 꾸면서 아내에게 폭언을 하거나 아이들을 마구 때리는 수면장애 환자도 있다. 악몽이 고요한 잠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사람들의 의식을 조종한 것이다.

노민선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리처드 디멘트 교수가 이끄는 '악몽을 꾸는지 알아내고 악몽이 포착되면 그것을 억제해 주는 장치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악몽을 억제하고 좋은 꿈으로 유도해주는 장치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수면과학의 역사는 150년 전 스탠포드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시작됐다. 인간은 여러 수면단계를 오가며 잠의 세계에 빠진다. 각 단계마다 뇌파의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아낸 것이 그 즈음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수면이 얕은 단계인 1~2단계 수면과 깊은 단계인 3~4단계 수면, 렘수면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잠을 자면 이 주기가 1시간 30분 간격으로 여러 번 반복된다.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은 전체적인 수면 구조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은 1990년대 초 스탠포드 연구진에 의해서다.

대부분의 렘수면 행동장애는 약을 복용하면 일주일 만에 증상이 대부분 사라지지만, 악몽에 시달리는 이른바 '악몽 증후군' 환자들은 약으로도 낫지 않는다. 2023년 스탠포드 수면연구소는 일단의 과학자들로 악몽 대책팀을 짰다. 1~2단계와 3~4단계를 거쳐 자연스러운 몸의 리듬으로 렘수면 단계에 가면 편안한 꿈을 꾸지만, 1~2단계 수면 뒤 3~4단계를 거치지 않고 또다시 1~2단계 수면을 취하면 곧바로 꿈수면으로 들어가 악몽을 꾼다는 연구결과에 착안하여, 수면단계를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수면뇌파 조절기'를 만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도록 델타파(1-4Hz)와 세타파(4-7Hz)의 전자기장을 가해 깊은 수면에 들어가도록 돕는 것이다.

노민선의 유학 시절 동료이자 서울특별시 수면과학연구소에서 일하는 민진영 박사는 렘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는 동안 뇌파의 특징만으로 꿈의 내용을 추적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악몽인지 단꿈인지를 파악해 악몽이라면 억제하고 단꿈이라면 계속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2048년 이라는 수면장애 저널에 실린 노민선과 민진영의 논문에 따르면, 이 장치를 통해 비선형 뇌파분석법을 사용하여 145명의 피험자들이 꾸는 꿈이 악몽인지 아닌지를 예측해 보았더니, 87%의 확률로 '악몽'을 맞췄다고 한다. 이 실험은 대부분 민진영 박사가 진행하였다.

노민선이 주도한 실험은 '종종 악몽을 꾼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의 머리에 '악몽억제 장치'(nightmare suppression device)를 장착하고, 악몽을 꾸려는 순간을 감지한 후 그것을 억제하여 깊은 수면상태로 옮겨주는 것이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노민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몽억제 장치'를 일상에서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적용하는 실험도 병행했다. 스트레스나 잦은 짜증 그리고 화가 혹시 자신도 모르게 시달린 악몽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개발한 장치는 '앵거 클리닉'에도 매우 유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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