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다함께]中동포 모자의 코리안드림

  • 입력 2009년 5월 4일 02시 55분


“함께 웃는 날 기다렸단다” 이날을 위해 17년을 기다렸다.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아들의 입국을 위해 모자간의 법적 인연까지 끊어야 했던 어머니. 이젠 당당하게 아들과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다음 달 결혼하는 아들 한승호 씨(가운데), 예비 며느리(왼쪽)와 함께한 중국 동포 유명희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홍진환 기자
“함께 웃는 날 기다렸단다” 이날을 위해 17년을 기다렸다.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아들의 입국을 위해 모자간의 법적 인연까지 끊어야 했던 어머니. 이젠 당당하게 아들과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다음 달 결혼하는 아들 한승호 씨(가운데), 예비 며느리(왼쪽)와 함께한 중국 동포 유명희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홍진환 기자
“우리에게도 이런 행복이 계속될 수 있을까.” 17년 만에 가족이 모이게 된 유명희 씨(오른쪽)와 아들 한승호 씨는 한껏 즐거워하면서도 불안하기만 하다. 홍진환 기자
“우리에게도 이런 행복이 계속될 수 있을까.” 17년 만에 가족이 모이게 된 유명희 씨(오른쪽)와 아들 한승호 씨는 한껏 즐거워하면서도 불안하기만 하다. 홍진환 기자
“아들 앞길 위해 호적서 사라져줘야…” 불법체류자 눈물의 이혼

《동아일보는 기존 기사 형식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삶과 현장의 이야기를 지면에 담아내기 위해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를 시작합니다. 내러티브 리포트는 주요 정보를 앞으로 올리는 기존 기사 형식과 달리 사람의 이야기(Storytelling)를 통해 생생한 현실감과 감성을 전달하는 기사입니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내러티브 리포트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욱 다양한 시선과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어머니 유명희 씨의 2004년

12년째 한국서 송금… 아들 서울대 합격
불법체류 가족 있다고 유학비자 퇴짜
이혼 결심하며 “정말 남이 되면 어쩌지

■아들 한승호 씨의 2009년

졸업후 벤처회사 취업… 체류자격 얻어
내달 결혼식… 17년 생이별 가족 한자리
“신혼여행 대신 제주도 가족여행 갈 것””

“어머니….”

2004년 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사는 중국동포 유명희 씨(55)는 중국에서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잇는 데 한참 걸렸다. 답답했다.

“무슨 일이야.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 봐.”

“정말 죄송한데…. 아버지와 이혼해 주세요.”

유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 분간 이어진 아들의 설명을 듣고 전화를 끊은 그는 멍한 상태에서 이혼에 필요한 서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국어를 쓴 지 오래돼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유 씨는 아들에게 미안한 게 많았다. 낮에는 간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뜨개질을 하느라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돈이 없어 좋은 것을 먹이지도 못했다. 커서는 한국과 중국에 각각 떨어져 사느라 전화로만 만날 따름이었다. 그래도 아들을 돕는 유일한 길이 둘 사이의 관계를 끊는 일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섭섭한 마음에 눈물이 맺혔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어색해진 중국 글자들이 더 흐릿해 보였다.

○ 서러운 불법체류 생활

중국 옌볜(延邊)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유 씨는 1992년 8월 한중 수교 직전에 한국에 들어왔다. 남편 한영길 씨(56)와 함께였다. 딱 몇 년만 고생하여 돈을 마련해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995년 “잠깐 다녀오겠다”며 중국에 간 남편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 씨 혼자 벌어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10년이 넘도록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쪽방과 식당일을 전전하는 힘겨운 나날이 시작됐다.

1999년 즈음이 가장 힘들었다. 식당의 음식배달을 위해 오토바이 연습을 하던 중 사고를 냈다.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한참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나왔다. 이런 증상이 3년을 갔다. 간호사 출신인 유 씨는 이 증상의 의미를 잘 알았다. 뇌진탕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증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냈다. 가족에게 아프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일을 제대로 못하니 중국에 돈을 잘 부치지 못했다. 가족은 되레 의심을 했다. ‘한국에서 혼자 돈 벌어 호강한다’는 것이었다. 단속에 걸릴까 봐 가슴을 졸이던 2004년 가을엔 경찰로부터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유명희 씨, 경찰서로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왜요?”

“‘독산동 토막살인’ 사건 피의자, 피해자와 아는 사이죠? 진술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안돼요. 나는 불법체류 중이라 못 갑니다.”

“불법체류는 문제 삼지 않을게요. 와서 진술만 하고 가세요.”

유 씨는 이 말을 믿고 경찰서에 갔다. 경찰은 유 씨의 진술에 만족했지만 함께 출두한 다른 중국동포 한 사람이 문제였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제대로 답을 못했다. 그러자 경찰은 유 씨를 경찰차에 태웠다.

“제대로 진술을 하지 않으면 이 아주머니를 바로 추방시킬 겁니다.”

“아니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요?”

“법대로 하는 겁니다.”

유 씨는 차 안에 3시간 넘게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서러웠다.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2005년 중국동포 불법 체류자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됐지만 유 씨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국적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소송까지 벌였다.

유 씨가 이런 생활 속에서도 버텼던 것은 아들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일하는 식당에서 가족끼리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솟았다. 하지만 돈을 벌어 가족에게 부쳐야 한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 코리안드림을 위한 눈물

그러나 중국 옌볜의 아들 한승호 씨(29)는 어머니의 어려움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어린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원망했다. 주변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방황했다. 한 씨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자신의 성적으로는 ‘옌지 시 제2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어 2만 위안(약 378만 원)을 내고 입학해야 했다. 한 씨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바닥을 헤매던 성적은 꾸준히 올랐다. 한 씨는 “한국에선 정보기술(IT)이 유망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연변과학기술대에 진학한 뒤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노력 끝에 2004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석사과정에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합격하는 데 성공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입국을 위한 유학비자(D2)를 받는 데서 발목이 잡혔다. 불법 체류자인 어머니 때문에 입국허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 입국을 위해 ‘D2 비자’를 신청할 때 모든 가족이 기재된 ‘호구부’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중국동포뿐이다. 고민하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나랑 엄마랑 이혼을 하면 해결된다고 하더라….”

“그래도 어떻게….”

아들은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아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법적으로만 갈라서는 것이지만 아예 남남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얻은 D2 비자를 들고 입국한 한 씨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다시 아버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 어머니와 아들의 꿈은 아직 진행 중…

어머니 유 씨는 2008년 국적을 얻기 위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강제 추방만 남은 처지였다. 4월부터 서경석 목사의 도움을 받아 같은 처지의 중국 동포 1000여 명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한 달 가까이 시위를 한 뒤 기적적으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16년 만에 얻은 합법적인 체류 자격이었다.

아들은 졸업 후 재외동포체류자격(F4 비자)을 얻어 국내 최대 소프트웨어 업체인 티맥스소프트의 연구원이 됐다. 다음 달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아내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결혼식 날 17년 동안 떨어져 지냈던 세 식구가 처음으로 한곳에 모이게 된다. 한 씨는 신혼여행 대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그러나 어려움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결혼식에 아버지를 초청하는 일도 힘들었다. F4 비자로는 부모를 초청할 수가 없었고, 중국에 있는 처삼촌의 집을 현지 여행사에 담보로 잡힌 뒤 여행사가 주중 한국 영사관에 보증을 서서 간신히 아버지가 올 수 있게 되었다. 유 씨는 H2 비자를 받는 데 성공했지만 5년이 지난 2013년 이후 체류 자격은 아직 불투명하다. 남편과 다시 결합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17년 동안 이어진 이 가족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중국 동포에 대한 출입국 정책과 편견으로 입은 상처가 여전하다.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하지만 유씨 가족처럼 ‘코리안드림’의 가혹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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