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금융공기업이 뭐기에

  • 입력 2009년 5월 15일 02시 56분


작년 3월 현 정부의 금융계 실세라는 인사가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후보에 올랐다가 탈락했다. 그 이후 거래소는 수사와 감사에 시달렸다. 공공기관으로 지정돼 정부의 간섭도 받게 됐다. 금융계 실세가 왜 하필 거래소를 골랐을까.

꼭 연봉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297개 공공기관 중에서 거래소 이사장 연봉이 최고였다. 연봉 7억9700만 원에 업무추진비 6900만 원을 합쳐 총 8억6600만 원을 받는다.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산업은행 등 거래소보다 큰 공기업의 기관장 연봉보다도 많다. 법으로 독점사업을 보장해 경쟁이 없으니 경영이 어려울 리도 없다. 편하고 월급 두둑한 직장이다.

연봉 많고 구조조정도 없는 직장

거래소를 비롯해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 산하 금융공기업들은 금융계 최고 수준의 고임금 직장이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 주택금융공사 등 20개 금융공기업 기관장들이 연봉과 업무추진비로 받는 금액은 평균 4억 원에 이른다. 이는 전체 공기업 기관장 평균 연봉의 2.2배 수준이다. 금융공기업을 뺀 277개 공기업의 기관장 평균 연봉은 1억3500만 원이다.

직원 처우도 좋다. 20개 금융공기업 직원의 1인당 연간 평균 보수는 7400만 원으로 공기업 전체 평균 5500만 원보다 1900만 원(35%)을 더 받는다. 초임도 3300만 원으로 전체 공기업 평균치에 비해 600만 원이 높다. 이러니 금융공기업 입사는 하늘의 별따기다. 학교마다 ‘금융 고시’에 대비한 스터디 모임이 만들어지고 논술 과외까지 생겼다고 한다.

구조조정도 없다. 거래소는 700명이던 정원을 작년에 750명으로 늘렸고 현재 근무인원도 707명으로 2005년보다 37명이 많다. 산업은행도 직원 수가 늘었다. 2004년 2086명이던 것이 작년에는 2368명이 됐다. 이미 8개의 자회사가 있는 데다 올 하반기에 정책금융공사와 산은지주회사로 분리되면 임원급 자리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경제위기는 금융공기업엔 위기가 아니라 호기(好機)다. 11년 전 외환위기를 전후해 예금보험공사 자산관리공사가 발족했고, 자산관리공사는 한국자산신탁이란 자회사도 차렸다. 산업은행은 부실 증권회사였던 대우증권을 살린다는 명분 아래 아예 자회사로 만들어버렸다. 출자회사 자회사를 파생금융상품 만들 듯이 척척 만들어낸다. 해외 금융정보를 조사한다는 국제금융센터가 설립됐고, 해외에 투자한다는 한국투자공사도 생겼다.

기존의 금융공기업이 문을 닫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욱이 친(親)공기업 정책을 폈던 노무현 정권이 민영화도 중단하는 바람에 공기업 팔자가 더 편해졌다. 그러나 그 부담은 결국 국민 몫이다. 세금이든 수수료든 더 내야 한다.

금융위기 덕에 물 건너간 민영화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개혁을 핵심 과제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가 금융공기업을 살렸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선 금융공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개혁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기업은행 민영화는 무기 연기됐고, 무산될 뻔했던 산업은행 민영화는 5년 뒤로 미뤄졌는데 이나마도 청와대가 채근한 결과다.

어제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금융공기업 기관장과 경영계약을 하는 자리에서 “높은 보수와 복리후생에 대해 고통분담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올해를 공공기관 선진화의 마지막 기회로 삼아 달라”고 말했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금융계 최고 대우를 받는데 국민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하지만 올해만 지나면 민영화니 개혁이니 사실상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준비하는 데만 최소 2, 3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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