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준모]삶과 미술 조화 보여준 클림트展

  • 입력 2009년 5월 16일 02시 54분


자신의 이름 앞에 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화가, 19세기 말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세기말 염세적 분위기가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던 오스트리아 빈을 죽도록 사랑했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서울을 다녀갔다. 그에게 몰입한 29만 명의 한국인을 만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포장되고 박제된 모습이 아니라 클림트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몇 가지 여운을 남긴 채 말이다.

클림트와의 만남은 세상을 바꾸는 힘과 계기는 예술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새삼 새기고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똑 닮게 그려야 했던 전통적인 회화는 인상파의 빛의 혁명으로 커다란 변모를 가져왔다. 하지만 회화의 혁명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영광과 몰락을 함께했던 빈에도 있었다. 클림트와 그의 친구들은 조각적 환영과 3차원적 눈속임 회화의 환영을 극복해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회화로 내면과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리고 건축 디자인 공예로 눈을 돌려 토털 아트를 주창하면서 보는 미술을 삶의 미술로 만들었다.

두 번째로 이번 전시는 짜임새 있는 구성, 즉 ‘박물관 해석’을 통해 클림트와 주변 사람의 새로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전시는 큐레이터의 시각을 통해 재구성한 또 다른 작품이다. 클림트전의 큐레이터는 예술과 미술이 어떻게 삶과 생활 속에서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사람의 삶을 바꾸고 이끌어 가는지를 확인시켰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보는 이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는 점이 국내의 다른 블록버스터 전시와 차별화됐다. 또 이번 전시는 문화도시나 예술도시를 표방하면서 미술과 미술품을 반드시 실외로 끌어내야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에 반성의 기회가 됐을 터이다.

세 번째로 클림트는 이번 만남을 통해 미술품 감상이 단지 아름다움을 즐기고 느끼는 일이라는 진부함을 버리도록 했다. 우리는 미술품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거나, 최소한 받는 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미술품은 아름다움 자체 이상의 것이다. 미술품이란 그 작품을 제작하던 시대와 정신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삶과 이데아를 짜내는 한 폭의 직물과 같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것’ 이상을 담아내는 집합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도 보지만 천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의미와 용도를 함께 새겨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클림트전은 그가 살아내야 했던 전통과 근대, 쾌활함과 우울함이 공존했던 빈에서 시도된 20세기를 향한 혁명을 음모하던 시대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현대미술을 보면서도 봉건주의 시대의 보는 방식에 머물던 우리에게 ‘보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과 아트센터가 제대로 기능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시켰다. ‘정론직필’과 ‘문화창달’이라는 사명을 다해 온 언론사가 민간과 협업해서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줬다. 흥행에 성공한다고 해도 위험부담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입밖에 보장되지 않음에도 말이다. 사실 이처럼 중요한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기회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미술관이 제공해야 마땅하다. 건물만 있는 채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임에야. 보다 못해 민간이 나섰지만 혈세로 멀쩡한 길 다시 깔고, 잘 자라는 나무 뽑아내는 돈으로 국민의 문화적 허기를 채워 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서 클림트전은 그들에게 옐로카드였던 셈이다.

정준모 미술비평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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