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삼성-현대 ‘적과의 동침’ 성공하려면

  • 입력 2009년 5월 18일 02시 58분


1980년대 열렸던 농구대잔치에서 삼성과 현대 팀이 맞붙으면 조용하게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선수들끼리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거나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코칭스태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특히 두 팀이 결승전을 벌이면 해당 그룹 임직원은 물론 총수들까지 직접 경기장에 나와 응원을 벌여 삼성과 현대그룹 간 ‘전면전’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두 그룹이 농구코트에서 ‘전쟁’을 벌였던 것은 재계 1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도체나 건설 등 사업 분야 곳곳에서 격돌하던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60, 70년대 삼성이 부동의 재계 1위였지만 현대가 자동차와 조선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1980년대 들어 재계 판도에 변화 조짐을 보이자 두 그룹은 외형 늘리기 경쟁에 돌입했던 것. 이 과정에서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중앙일보가 현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자 현대 측이 다른 일간지에 반박 광고를 내는 등 ‘감정싸움’도 빚어졌다. 재계에서는 이런 구원(舊怨) 때문에 두 그룹이 돈독한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고 보았다.

최근 이런 관측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삼성그룹의 간판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그룹의 적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현대·기아자동차가 차량반도체 공동 개발을 위한 논의에 들어간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과 현대가 ‘적과의 동침’을 시작했다는 기대감에 찬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두 그룹이 ‘동침’을 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선 상호 신뢰 회복이 급선무다. 삼성 일각에서는 이번 협력을 통해 반도체 기술이 현대로 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과거 현대그룹이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세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던 전례가 있는 만큼 현대·기아차가 이번 협력을 통해 습득한 반도체 기술로 독자적인 차량반도체 회사를 세울 가능성이 있다는 것.

현대차는 삼성이 차량반도체 협력을 이용해 자동차 사업에 다시 뛰어드는 시나리오를 걱정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경영난에 빠진 GM대우자동차나 쌍용자동차가 삼성에 넘어가면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기아차가 차지하는 독보적인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질적인 기업문화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재계에서는 ‘조직 및 관리’의 삼성과 ‘저돌적인 추진력’의 현대가 협력 논의 과정에서 불협화음을 낼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삼성으로서는 잘못된 목표라도 일단 정해지면 밀어붙이는 현대가 무모해 보일 수 있다. 현대로서는 고지를 앞에 두고 자로 잰 듯한 계획을 빌미로 발목을 잡는 삼성이 답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이번 협력은 상대방의 노림수에 대한 의구심과 상이한 조직문화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여기에다 두 그룹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해묵은 자존심 싸움도 최종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과 현대가 어떤 결론을 낼지 모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외교 사회의 잠언을 되새겨 보기를 권한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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