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법이 궤변의 방패이고 불의의 피신처인가?

  • 입력 2009년 5월 18일 19시 57분


부산지법 제5민사부(재판장 고재민)가 7일 내린 희한한 판결로 여론이 들끓고 있다. 부산대(총장 김인세)가 거액의 기부금을 약정된 사용목적과 달리 썼어도 기부자 ㈜태양 송금조 회장은 기부를 중단해선 안 되고, 사용목적을 지정했어도 기부가 수혜자 측이 기부조건을 지키도록 의무화하는 ‘부담부증여’라고 볼 수는 없다는 내용이다. 이런 판결이 선례가 된다면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 기부문화는 어찌 되고 더 나아가 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사건은 미담으로 시작됐고 미담으로 끝났어야 될 일이었다. 부산 기장 마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일찍 사회생활에 뛰어든 송금조 회장은 불굴의 기업가적 의지와 초인적 근검절약으로 부산 지역 납세자 1위에 올랐던 중소기업인이다. 87세인 아직도 60년 전부터 살던 조그마한 집에서 살며 일손을 놓지 못해 휴가여행 한 번 안 해본 그가 2003년 부인의 권고를 받아들여 부산대가 양산에 제2캠퍼스 용지를 매입할 돈으로 305억 원을 쾌척하기로 했고 개인 기부로는 역사상 최고액이었던 이 일은 당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일이 뒤틀린 이유는 김인세 총장이 그 돈을 교수 연구비 등으로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약정액 중 195억 원을 낸 뒤에야 용지 대금은 지불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기부금은 없어졌음을 알게 된 송 회장이 195억 원의 사용 경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김 총장은 약정된 기부금이 마치 총장 임의로 쓸 수 있는 발전기금이었던 듯 반격을 가했다. 원래 목적과 달리 쓰인 기부금의 사용 경위를 투명하게 밝히고 미지급 약정금 110억 원에 대한 지불 의무는 말소해 달라는 요청조차 거부당하자 송 회장 측은 할 수 없이 소송을 냈다.

‘부산대 기부금 전용’ 희한한 판결

겉으로는 이 재판이 돈 110억 원의 향방에 관한 것인 듯 보이나 기부자 측의 관심의 초점은 돈에 있지 않다. 송 회장은 부산대 기부 후인 2004년에도 1000억 원의 사재를 출연하여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인문사회 예술 생명과학 자연과학 공학 등 5개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 실적을 보이는 현역을 선발하여 각각 1억 원씩 시상하고 있다. 부산대를 돕는 일이 목적인데 소송까지 할 수 있나 하는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송을 결심한 이유는 거액의 기부금을 총장이 아무에게도 책임 질 필요 없이 자의적으로 유용하는 관행이 묵인된다면 대학의 진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소송의 그런 취지 때문에 기부약정 잔액에 대한 지불의무는 면제받되 이미 지급된 195억 원의 사용 명세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취지의 법원 측 강제조정안도 거부했다.

이 판결의 사회적 함의는 충격적이다. 무학의 핸디캡을 딛고 서서 평생 어렵게 벌어 모은 큰 재산을 자기는 쓰지 않고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대학을 위해 선뜻 내놓은 기부자의 뜻과 인격을 대한민국 제2의 국립대인 막강한 지식인 집단이 마구 짓밟는 데 법마저 그에 가세했다. 송 회장 규모는 아니더라도 자기는 평생 쪽방에서 살며 행상을 해서 모은 돈을 대학에 기부하는 아름다운 사례가 확산되는 추세에서 수혜기관의 장이 기부목적과 상관없이 돈을 써도 무방하다는 판결이 나온다면 귀한 돈이 남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고 누가 기부를 하려 들 것인가….

대학 측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총장이 유휴 자금을 연구비 등으로 전용하는 일이 무엇이 잘못인가 반문한다. 하지만 이제 대학은, 특히 거대한 국립대는 남의 돈을 전용해야 할 정도로 연구비에 결코 궁핍하지 않다. 더구나 대학은 기부자의 뜻에 어긋나게 쓰이는 기부금을 법의 이름을 빌려 갈취해 내려 할 정도로 도의적으로 무감각해도 되는 기관이 아니다.

법의 이름으로 ‘기부의 뜻’ 살려야

교육과학기술부와 감사원은 부산대에 특별감사를 실시하여 용지 대금으로 기부받은 195억 원의 용처를 소상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기부문화의 위축으로 성실한 수혜기관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일을 막고, 대학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함으로써 지식인 사회 전체의 명예와 도덕적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길이다. 부산대의 발전을 장기적 안목으로 원하는 그 대학의 졸업생, 재학생, 교수라면 대학 측의 승소를 반길 일이 아니라 목적이 명시된 기부금을 자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대학의 도의적 위상을 추락시킨 데 대한 총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가장 주목해야 할 일이 항소심에서 사법부가 보일 태도이다. 법이 정의의 보루이지 궤변의 방패이고 불의의 은신처가 아님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쳐 버린다면 이 나라에서 법치가 살아남을 길이 없을 것이다. 법 조항이 잘못됐으면 고쳐서라도 평생 고생해서 모은 돈을 자기가 이해하는 투명한 방법으로 사회를 위해 기부하겠다는 사람에게 기쁨과 보람 대신 수모와 비탄을 안겨주는 부당한 일이 법의 이름으로 반복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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