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포스터는 2006년 소프트뱅크라는 기업이 휴대전화 사업에 진출하며 야심적으로 내놓은 캠페인 광고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가 등장했다는 것 외에 별 특징은 없다. 그러나 쉽게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 광고 이면에는 커다란 브랜드 론칭 전략이 숨어 있다.
공모전 수상 디자인이나 공익성 디자인은 디자인의 전체적 맥락을 알 수가 없어 독창성만을 보고 평가한다. 총구의 끝이 담배로 변하는 금연 포스터처럼 시각적 충격을 주는 디자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다르다. 톡톡 튀는 일회성 광고로 소비자가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광고는 전략적으로 짜인 일련의 캠페인으로 구성돼 소비자들을 설득한다. 너무 작위적으로 만들면 그만큼 광고주의 의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감동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감성적인 존재다. 이성으로 설득돼도 감성이 통하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논쟁에서 이겨도 거래에서는 진다”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감성은 쉽게 언어화하기 어렵다. 예컨대 주먹보다 조금 큰 빨간 과일이 있다고 하자. 그 과일의 언어적 의미는 맥락에 따라 사과, 열매, 결과, 유혹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식욕을 자극하는 잘 익은 붉은색의 감성적 유혹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고 내가 지금 유혹에 흔들리는 까닭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무의식중에 이런 감성에 촉촉이 젖는 것이다.
소프트뱅크의 포스터로 다시 돌아가자. 소프트뱅크는 후발업체로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하면서 먼저 로고마크를 디자인했다. 인터넷 업체가 가진 저가(低價) 이미지를 없애되 NTT도코모나 AU와 같은 선발업체에는 없는 혁신적인 통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미지를 주고자 했다. 고심 끝에 선택된 디자인은 손정의 사장이 존경하는 메이지 혁명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가 창설한 무역선단의 가로 두 줄로 된 깃발 모양을 정리한 것이었다.
소프트뱅크는 우선 이 마크를 새로 인수한 프로야구단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유니폼에 적용해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대중들의 관심이 휴대전화사업에서 멀어져 있던 2006년 3월 보다폰이라는 이동통신업체를 전격 인수해 그해 10월 통신사업을 시작한다. 소프트뱅크는 이 속도감을 ‘혁신’이라는 이미지로 연결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보다폰 매장을 신속하게 소프트뱅크 매장으로 바꿨다.
매장의 디자인 전략은 고급스러움, 공사의 신속성, 혁신적 이미지에 맞췄다. 비용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미리 만들어 놓은 로고마크를 은색으로 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매장의 내·외장은 전부 흰색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단색이라 시공기간은 불과 2, 3일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마치 패션숍과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매장을 저비용으로 순식간에 전국에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빠른 시간 내에 선발업체들과 경쟁하려면 좀 더 압도적이고 차별화된 존재감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할리우드 스타들이다. 인기뿐 아니라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캐머런 디아즈와 브래드 피트가 선택됐다. 포스터에서 그들은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지만 입은 다물었고 시선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시선이 향한 곳에 로고마크를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별한 스토리나 작위는 없지만 보는 이가 눈치 채기 힘든 많은 고려를 담은 것이다. 이런 고려는 조용히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TV광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각기 거리를 걸으며 누군가와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내레이션도 없이 에어로 스미스의 ‘Walk This Way’만이 흐를 뿐이다. 이는 두 스타의 통화 모습을 통해 휴대전화의 특성을 직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읽어 고객이 다양한 스토리를 추측하도록 유도했다. 약한 호기심 유발광고를 한 것으로 휴대전화처럼 소비자들이 잘 알고 있는 상품에서 쓰면 유용한 기법이다. 그 다음 말없이 소프트뱅크의 로고 마크가 등장한다.
하루아침에 기존 업체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급스럽고 강렬한 휴대전화 매장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오픈하고 TV에서는 광고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쇼윈도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할리우드 스타의 커다란 포스터가 행인들을 압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프트뱅크는 나약한 후발업체가 아닌 강력한 경쟁사가 되어 있었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