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0>

  • 입력 2009년 6월 8일 13시 51분


바람은 비를 부르고 슬픔은 불운을 낳는다. 이미 꼬인 일들이 풀리기도 전에 더 많은 일들이 엇갈려 뒤섞인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말은 쉽지만, 일을 처음 묶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풀기 어렵다. 속 깊은 후회 때문이다 : 이럴 계획은 아니었어. 이건 내 생각과 달라. 난 산뜻하게 풀고 처음부터 다시 묶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었어. 진심이야. 믿어 줘.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앨리스는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했다. 병식은 자기가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앨리스는 10초만 기다렸다가 뛰어들 생각이었다. 병식에게 야단맞는 것은 한 쪽 귀로 흘리면 그만이지만, 10초가 지나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다.

문 바로 옆 벽에 붙어 호흡을 골랐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앨리스가 단숨에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이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멈춰 섰다. 병식 역시 방 가운데 서서 회전의자에 쓰러진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치켜 뜬 눈에는 두려움이 서렸고 반쯤 열린 입에서는 찐득한 침이 목까지 흘렀다. 두 손은 당장이라도 헤드셋을 벗기려는 듯 귀를 향했지만, 오그라든 열 손가락은 귀에 닿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엉거주춤 걸렸다.

앨리스가 병식을 앞질러 다가가서 검시용 장갑을 쓴 후 호흡을 확인했다. 맥박이 없었다. 앨리스는 헤드셋을 벗긴 후 두개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연쇄살인사건은 아닌 것이다. 그녀의 손이 다시 문종의 뒷머리를 쓸다가 공이 튕기듯 떨어졌다.

"앗, 뜨거!"

몸 안에 마이크로컴퓨터를 심은 지도 20년이 넘었다. 특별시연합법에서는 이 마이크로컴퓨터를 뇌에서 적어도 2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신체에 심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즐기고 쾌락이 최단시간에 뇌에 닿기를 원하는 매니아들은 이 규정을 어기고 컴퓨터를 바로 뒷머리에 심었다. 그러나 뇌까지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이렇게 화상을 입을 만큼 컴퓨터가 뜨거워지기는 어렵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두피까지 타버렸네."

앨리스가 헤드셋에 손을 대는 순간 병식이 말했다.

"그냥 둬! 아무래도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하니, 최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겠어."

"은 검사님께 먼저 보고하죠. 촬영 후 증거품을 수거하는 일까지 우리들 몫이란 건 아시죠?"

병식이 미간을 좁히며 받아쳤다.

"맘대로 해. 그렇게 꼬박꼬박 보고하는 남 형사가 왜 폐쇄동굴에선 성 형사나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지?"

"지 선배! 그건 상황이 너무 급해서……."

"아니아니, 상황이 급하기 전에 말이야. 평소의 남 앨리스라면 폐쇄구역에 내려오면서 우리에게 연락을 취했을 거야.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면 성 형사가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테고. 이 어깨를 뚫고 지나간 총알을 생각하다가 말이야, 어쩌면 우리 팀 막내가 성 형사와 날 미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남 형사 단독으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고 은 검사가 시켰겠지? 어때 내 추측이?"

"아, 아닙니다. 제가 왜 성 선배와 지 선배를 미행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린 사나 죽으나 한 팀입니다. 가족이라고요."

병식이 앨리스의 눈동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축 늘어진 볼에 바람을 한껏 집어넣으며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농담이야. 가족! 그래 우린 패밀리지. 보안청이란 정나미 떨어지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정이 넘치는 패밀리!"

"지 선배! 놀랐잖아요."

앨리스도 화가 난 듯 눈을 살짝 흘기며 이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왁자지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방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문종아!"

"오빠! 게임 끝났어?"

"정신차려 방문종! ……뭣 하는 년놈이야?"

"죽엿!"

그들은 옆방에서 문종이 게임을 마치기만을 기다린 듯했다. 그들이 총을 뽑기 전, 앨리스가 먼저 공중제비를 돌며 달려들었다. 앞선 사내 둘을 양발 차기로 쓰러뜨린 뒤 병식을 향해 외쳤다.

"지 선배, 달려!"

앨리스 런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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