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정치는 민주주의 비용 키워
2500∼2600년 전에 번성한 직접민주정의 성취는 참으로 눈부셨다. 아테네라는 도시국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도 그 광휘(光輝)가 변치 않는 이유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에 빛만 있었던 건 아니다.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지나 아테네의 몰락을 재촉한 요인은 민주주의에 수반된 중우정치였다. 민주주의를 만든 시민의 자유가 방종과 무절제로 타락하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침몰시킨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대 이후 국가가 너무 커져 시민이 직접 참여해 나라를 운영하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향수는 강렬하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집권한 정당이나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충실히 ‘대의’하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제왕적 대통령제인 우리 풍토에서 대통령이 민심과 줄곧 엇나간다고 판단될 때 시민이 ‘직접’ 발언하려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2008년 촛불’이나 최근 잇따른 시국선언 등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의 일대 소용돌이도 그런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취약한 정당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정당 간의 정책 경쟁을 중심으로 한 의회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민의를 모아 정책을 실현해야 할 국회가 제 구실을 못할 때 권력과 국민 사이의 갈등은 정면 대결로 치닫기 마련이다. 2008년 촛불이 외친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가 생생한 실례다. 정당정치를 통한 민의수렴과 갈등해소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제도권 밖 운동정치의 공간이 지나치게 확대된다.
문제는 거리의 정치와 광장의 정치로 상징되는 운동정치가 커질수록 정치의 불확실성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비용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국민의 고통도 깊어지며 국정은 비틀거린다. 익숙한 한국정치의 풍경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야말로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고 견인함으로써 헌정질서를 지키는 주요 주체여야 한다. 의원이 거리나 광장이 아니라 의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는 상식이다.
정부, 시민과 소통해야 난국 돌파
위기의 순간일수록 우리는 근본을 찾는다. 고대 민주주의의 원점에 아고라가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아고라가 자유 시민이 소통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소통의 장인 민주질서와,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질서가 서로 충돌하며 병존했다. 시장의 힘이 너무 커질 때 민주주의가 훼손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다. 기업경영자의 신화를 넘어 일류 정치인을 지향하지 않는 대통령은 결코 성공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시장논리를 넘어 시민과 소통하는 담대한 경세제민의 리더십만이 오늘의 난국을 돌파한다.
성숙한 아고라 민주주의에서 시민적 자유는 제멋대로 할 자유를 뜻하지는 않는다. 민주 시민은 법을 준수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이명박 정부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법의 지배’가 아니라 공안기관을 동원한 자의적 ‘법에 의한 지배’를 일삼을 때 법치주의는 균열된다. 시민이 삶의 현장에서 법을 지키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진다. 결국 이중의 위기가 촉발한 광장의 정치는 정당정치를 보완할 뿐이지 대체할 수는 없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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