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3>

  • 입력 2009년 6월 11일 13시 30분


[ '결정적 순간'을 위한 디자인]

오전 8시 25분. 차가운 아침 공기가 긴장감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시간이다. 최 볼테르는 허겁지겁 자신의 차에 올랐다. 전날 글라슈트가 8강전을 치른 탓에 몸이 무척 피곤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오늘은 SAIST 테크노-MBA에서 <휴머노이드 로봇과 산업적 응용>이라는 세미나 과목의 특강이 예정된 날이다. SAIST 경영대학원 기술경영학과 채용욱 박사가 석 달 전 세미나를 부탁했을 때, 얼핏 '배틀원 2049' 8강전 일정이 맘에 걸렸다. 하지만 글라슈트가 이토록 선전을 할지는 예상치 못 한 터라, 특강을 하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볼테르는 글라슈트에 관한 세미나를 매우 즐겼다.

버튼을 누르고 시동을 건 후, 목적지를 SAIST 주차장으로 맞추고 이내 출발했다. 자동운전 모드로 설정하고 25분 남짓 주행하는 동안, 그는 특강 발표 자료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뒷좌석에 홀로그램을 띄워놓고 삽입된 문장들을 손봤다.

특강이 예정된 강연장은 SAIST 슈펙스관 3층 301호였지만, 청중이 몰리면서 1층 101호 대형 강당으로 바뀌었다. 20명 정도로 예상했던 청중이 100명을 훌쩍 넘긴 것이다.

당연히 글라슈트의 선전 덕분이리라.

청중의 대부분은 로보틱스를 전공하거나 산업적으로 응용하는 데 관심이 많은 대학원생들이다. 글라슈트와 '배틀원 2049'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두 경기를 치른 볼테르의 생생한 현장경험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SAIST 로봇공학과 석사과정 재학생들이다. 볼테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박사님, 안녕하세요? 너무 축하드려요."

채림, 이민우, 이나영, 이은주, 김정현, 추자현, 정성화, 류중희.

볼테르가 작년에 학부 과목으로 개설한 <로봇디자인개론>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로, 대학원까지 함께 진학한 단짝이다. 이들은 로봇 축구에도 관심이 많았고, 채림, 이민우, 이나영과는 '학부생을 위한 개별연구'까지 함께 했다.

이은주가 꽃다발을 건네자, 볼테르는 멋쩍은 듯 웃었다.

"뭘, 이런 걸…… 고맙다"

"오늘 특강 잘 들을게요."

다들 잰 걸음으로 청중석 앞자리로 돌아갔다. 꽃다발을 조용히 단상에 내려놓고 볼테르는 맨 앞자리에 긴장된 표정으로 앉았다.

오전 9시 10분. 채용욱 박사가 오늘 특강 연사의 간단한 이력과 함께 그를 소개하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SAIST 차세대로봇연구센터 최 볼테르입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볼테르가 인사를 하자 큰 박수가 강당을 울렸다. 그는 이미 로봇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의 '우상'이었다. 강당 중앙에 홀로그램을 띄우고 강연을 시작하자, 청중석은 이내 조용해졌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요즘 '배틀원 2049'에 출전하고 있으며, 저희 글라슈트가 8강에서 M-ALI를 누르고 4강에 진출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분들이 글라슈트의 내부구조와 작동원리를 궁금해 하실 것 같아 거기에 관한 자료를 좀 준비해 왔습니다. 글라슈트를 설계하면서 저희가 각별히 신경을 쓴 부분도 말씀드리고요."

볼테르는 제일 먼저 '글라슈트의 해부학'이라는 제목의 홀로그램을 띄워 글라슈트의 내부를 공개했다. 수많은 전선들이 신경다발처럼 연결되었고, 골격을 유지하고 척수의 역할을 하는 부분도 인체와 비슷했다. 볼테르는 각 부분의 역할을 소개하면서 동작원리까지 설명했다. 중반부에서는 그 주제가 시스템적인 기능으로 옮겨갔다.

"시스템 제어를 위해 저희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로봇이 가격을 당했을 때 몸의 균형을 잡는 과정입니다. 이건 현재 로봇 바디의 중앙에 위치한 '림조절장치'(Limb control Processor, 사지 조절장치)가 맡고 있습니다. 저희는 일본 ATR연구소 (Advanced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에서 처음 개발한 '다이나믹 발랜싱'(Dynamic Balancing)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CRT 300 센서 100개를 2차원 평면에 정방형 형태로 어레이(Array)를 구성한 다음, 각 센서가 감지하는 압력을 유한요소법(Finite element method)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최 교수님, 유한요소법을 이용하면 계산량이 많아 빠르게 반응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계산을 위해 어떤 알고리즘을 사용했나요?"

전산학을 부전공한 학생답게, 채림이 볼테르에게 알고리즘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좋은 질문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계산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연속된 가격에 쉽게 쓰러질 수 있습니다. 저희는 '어드밴스드 몬테 카를로'(Advanced Monte Carlo) 방법을 썼고요. 그래서 압력을 많이 받은 부분을 0.1간격으로 계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이언트 바바 III와의 32강전에서 저희가 고전을 했던 것도 글라슈트의 이 알고리즘에 버그가 있어서 제대로 계산을 못했기 때문인데요, 16강전부터 많이 맞아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던 것도 개선된 알고리즘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게중심을 빠르게 찾아낸 후, 그곳이 잘 균형을 잡도록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초기 알파값과 타우값은 0.01과 0.03으로 각각 세팅했고요."

청중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글라슈트의 내부 구석구석을 쫓아갔다.

"글라슈트가 다른 격투로봇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도 작고, 동력도 'V16 파워엔진'과 'CFR 7500' 배터리를 사용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막강한 격투로봇들과 대적하기에는 버겁지 않나요?"

이나영이 볼테르의 신경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졌다.

"저는 로봇 디자인과 설계에 있어 저만의 철학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휴머노이드 격투로봇은 최대한 파워를 키우고, 그것을 경기 내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잘 '안배'하도록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싸우는 걸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싸우면서 힘을 안배하나요? 정말 잘 싸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판사판 가리지 않고 무작정 덤비면서 순간적으로 최대한의 파워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죠. 아무리 덩치가 크고 근력이 좋은 사람도 죽자사자 덤비는 사람을 이기기 힘듭니다. 순간적으로 운동량을 한 곳에 집중하는 능력이 바로 '격투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충격량은 힘과 시간의 함수로 정의되니까, 힘이 작더라도 순간적으로 가격해서 시간을 줄이면 순간 충격량이 커질 수 있다는 얘긴가요?"

추자현이 볼테르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저희 글라슈트는 인간의 척수에 해당되는 '림조절장치'가 있는데, 이곳이 두 팔과 두 다리의 운동을 조절해서 힘을 안배합니다. 저희는 이곳에 순간가속이 좋은 엔진을 달아 순간충격량이 최대가 될 수 있도록 설계해 두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로봇 림(Limb, 팔과 다리)에 자동차 파워엔진 'V16 크로노스'를 단 예는 없었지요. 저희는 림조절장치로 이 파워엔진을 조절하여 순간가속도를 최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이언트바바 III와의 대결에서 '회오리 훅'의 비밀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볼테르는 기다렸다는 듯, 홀로그램으로 그 장면을 재생했다.

"하지만 'V16 크로노스'는 발진해서 가속되는 과정이 선형적인데, 아시다시피 이번에 페라리사에서 개발한 'V32 티애라'는 비선형적으로 가속돼 순간가속도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쓰면 굉장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성화의 질문에 볼테르는 순간 흥분했다.

"역시 SAIST 학생답습니다. 좋은 지적이에요. 사실은 그게 바로 제가 꿈꾸는 '파워 로봇'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직 아무도 38억 원이 넘는 스포츠카에 들어있는 'V32 티애라'를 파워로봇에 장착할 생각을 안 하고 있지요. 글라슈트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부상으로 주어지는 연구비로 'V32 티애라'를 우리 글라슈트에게 선사할 생각입니다. 그럼 우리 SAIST는 '우주 최강 로봇'을 갖게 될 겁니다."

볼테르의 눈이 결연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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