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선 여야의 역학 구도를 뒤집을 힘이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의 돌연한 서거가 정치의 판을 이처럼 흔든 것은 깊은 분석이 필요한 현상이다. 그가 생을 단념하기 전 ‘사즉생(死則生)’의 정치적 대반전을 예상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재조명을 받게 됐고, 폐족(廢族)이라 자조(自嘲)하던 친노 386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기사회생시킨 건 분명하다.
관심은 앞으로의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했지만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우리 사회의 반목과 갈등을 극복하는 전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퍅한 편 가르기와 이전투구의 불쏘시개가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하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를 받들겠다고 목청을 높이기 전에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행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인기가 바닥이었을 땐 민주당 구성원 중 상당수는 그와 함께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이제 와 노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건 그의 정치적 유산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상속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보기 딱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노선이 옳다면 그 전엔 왜 그를 그리 외면했는가. 친노 직계도 마찬가지다. 비리에 연루된 측근들이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잇달아 흠집을 냈고 결국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의 불행은 가족과 정치적 패밀리에 대한 제가(齊家)에 실패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가치를 이어가려거든 자신들의 도덕적 흠결부터 먼저 반성하고 논란이 많았던 노 전 대통령의 정책 중 무엇을, 왜 계승할 것인지 밝히는 게 옳다.
한나라당은 서민들의 마음에 노 전 대통령처럼 소탈하게 다가설 수 있는 정치인이 당에 없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옳든 그르든 노 전 대통령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정치인이 그 당에 얼마나 있는가. 여당의 책임을 방기한 채 세비나 타먹으라고 국민이 표를 모아준 게 아니다. 그런 마당에 TV 방송이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해 영웅을 만들었다고 탓한들 부질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한다고 하야를 요구했다가 막상 하야했을 땐 대성통곡한 게 우리 국민이다. 심성이 착한 국민이라 그런 걸 어떻게 하겠는가. 따가운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만장(輓章)정국이 차츰 마무리돼 가고 있다. 사회가 충격에서 벗어나 냉정을 되찾아가는 것에 맞춰 여야가 손을 모아 고달픈 민생을 돌봐야 한다. 정치인들이 싸움질에만 골몰하다간 언제 유명을 달리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국민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