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만가(輓歌)가 끝난 뒤

  • 입력 2009년 6월 12일 03시 03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치러진 지 2주일이 지났다. 그의 비극적 투신은 정치 지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민주당은 추모 열기에 힘입어 2005년 4·30 재·보궐 선거 이후 4년 만에 지지율에서 한나라당을 앞섰다. 이에 고무돼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부르짖다 급기야 국회를 외면한 채 길거리로 뛰쳐나갔다. 반면 싸늘히 돌아선 민심에 당황한 한나라당은 자세를 바짝 낮춘 채 활로를 찾으려 부심하고 있으나 계파 간 갈등 때문에 쇄신은 지지부진하고 적극적인 국정 추동은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다.

살아선 여야의 역학 구도를 뒤집을 힘이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의 돌연한 서거가 정치의 판을 이처럼 흔든 것은 깊은 분석이 필요한 현상이다. 그가 생을 단념하기 전 ‘사즉생(死則生)’의 정치적 대반전을 예상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재조명을 받게 됐고, 폐족(廢族)이라 자조(自嘲)하던 친노 386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기사회생시킨 건 분명하다.

관심은 앞으로의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했지만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우리 사회의 반목과 갈등을 극복하는 전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퍅한 편 가르기와 이전투구의 불쏘시개가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하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를 받들겠다고 목청을 높이기 전에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행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인기가 바닥이었을 땐 민주당 구성원 중 상당수는 그와 함께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이제 와 노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건 그의 정치적 유산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상속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보기 딱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노선이 옳다면 그 전엔 왜 그를 그리 외면했는가. 친노 직계도 마찬가지다. 비리에 연루된 측근들이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잇달아 흠집을 냈고 결국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의 불행은 가족과 정치적 패밀리에 대한 제가(齊家)에 실패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가치를 이어가려거든 자신들의 도덕적 흠결부터 먼저 반성하고 논란이 많았던 노 전 대통령의 정책 중 무엇을, 왜 계승할 것인지 밝히는 게 옳다.

한나라당은 서민들의 마음에 노 전 대통령처럼 소탈하게 다가설 수 있는 정치인이 당에 없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옳든 그르든 노 전 대통령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정치인이 그 당에 얼마나 있는가. 여당의 책임을 방기한 채 세비나 타먹으라고 국민이 표를 모아준 게 아니다. 그런 마당에 TV 방송이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해 영웅을 만들었다고 탓한들 부질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한다고 하야를 요구했다가 막상 하야했을 땐 대성통곡한 게 우리 국민이다. 심성이 착한 국민이라 그런 걸 어떻게 하겠는가. 따가운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만장(輓章)정국이 차츰 마무리돼 가고 있다. 사회가 충격에서 벗어나 냉정을 되찾아가는 것에 맞춰 여야가 손을 모아 고달픈 민생을 돌봐야 한다. 정치인들이 싸움질에만 골몰하다간 언제 유명을 달리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국민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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