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김일성은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을 약속했다. 살기 좋은 사회주의 조선의 상징이었다. 이미 1950년대의 일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그런 세상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인민은 그 고단했던 천리마운동에도 불평 없이 참여했다.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꿈속에선 쌀밥을 먹고 있었다. 행복한 희망이 있었고,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며 몰아붙여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김일성은 느닷없이 ‘주체’를 선언했다. 경제에서는 자립을 기치로 걸었다. 듣긴 좋았다. 인간답게 주체적으로 살자, 비굴하게 예속당하지 않고 살자. 구호는 황홀했다. 그러나 땅도 작고 자본도 없고 그저 있는 것이라고는 노동뿐인 경제가 바깥세상과 담쌓고 살겠다는 계획은 애당초 무모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체의 깃발이 걸리는 순간, 쌀밥은 정말 꿈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변했다. 배부른 세상이 오리라 믿었던 인민은 배신당했다.
주체-강성대국 다음은 무엇인가
1970년대 김정일에게 권력이 이양되기 시작했다. 부왕과 함께 통치하는 구도에서 세자가 아버지의 이념을 거스르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안전했다. 노동 투입에 의존하는 천리마운동 방식의 성장전략은 한계에 달해 기술진보를 강조하는 전략으로 옮겨가야 했지만, 감히 아버지의 경제관이 이제는 낡아서 버려야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살아 있는 권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은 그를 기반으로 권력을 지니게 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천리마운동은 1970년대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1980년대 속도전으로 이름만 바꿔 더욱 강렬히 진행되었다. 세계는 21세기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북한은 온통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뿌듯했고, 김정일은 만족했다. 마침내 1992년 김일성은 아들의 50세 생일에 직접 헌시(獻詩)를 바쳤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다/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문무충효 겸비하여 모두 다 우러르네.’ 확실한 후계 증명서였다. 아들도 이에 못지않았다. 1997년 김일성의 3년 탈상에 맞추어 그의 생년을 기점으로 한 주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생일은 태양절로 명명되었고, 북한 최대의 명절로 기념되었다. 인민은 또다시 무시되었고 배신당했다.
그러나 부자간에 서로 칭송하며 권력을 물려준들 뭐 하랴. 인민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피폐해져만 갔다. 당연한 일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왔고, 쌀밥에 고깃국은커녕 풀뿌리며 나무껍질이 주식이 되었다.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살아남은 인민들은 말했다. 1990년대보다는 1980년대가 나았고, 1980년대보다는 1970년대가 차라리 나았다고.
인민을 위한다면 김정일은 눈을 밖으로 돌려야 했다. 아버지는 죽었으므로 주체를 버리고 개방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것만이 인민을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1998년 공식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오른 그는 ‘강성대국’ 건설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렇게 강성대국은 김정일 시대의 슬로건으로 등장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아버지 시대 주체 강국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죽었어도 살아 있었다. 세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죽은 아버지를 영생의 수령으로 모시는 것은 김정일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했지만, 권력의 굳건함을 향유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기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에겐 또 한 번의 참담한 배신이었고 암울한 슬픔이었다.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자연히 쌀밥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 할 수 없이 인민은 옥수수나 감자라도 먹고살기 위해 ‘계획경제’ 밖에서 떠돌아야 했다.
‘가문의 영광’밑에 희망잃은 인민
그리고 3대 세습이 다가왔다. 김정일은 올해 초부터 ‘해와 별이 빛나는 혁명의 수뇌부’라며 아들을 ‘별’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방법 그대로였다. 김정일은 아버지의 탄생 100년이 되는 2012년까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고 그를 위해 올해는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겠다고 했지만, 이는 결국 ‘김씨 공화국’의 토대를 닦고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달아주겠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했듯, 또 그렇게 아버지를 대할 것이다. 오로지 ‘가문의 영광’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인민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이젠 더는 희망도 없이, 아주 지독하게.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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