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10월 말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제37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 참석한 미국 국방부 관계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한국 측이 SCM 공동성명에서 미국의 핵우산 제공 조항을 삭제하거나 문구를 변경하자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은 이런 조치를 통해 북한이 요구하는 ‘비핵지대화’를 수용하면 북한도 스스로 핵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남측이 선의의 제스처를 취하면 북측이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으로 화답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북한의 핵무기는 자위용이다’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냐’는 정부 내 감상적 대북 인식도 ‘핵우산 삭제론’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차라리 공동성명을 내지 말자고 거부했고, 결국 한국이 요구를 철회해 ‘핵우산 공약’은 유지될 수 있었다. 노 정권 시절 북핵 위협에 대한 한미의 인식 차는 계속 벌어졌고 동맹의 균열도 가속화됐다. 양국의 대북 공조가 삐걱대는 동안 북한은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2006년엔 마침내 핵실험을 강행했다. 현실화된 북의 ‘핵 협박’에 국민은 분노하고 불안해했다. “정부가 대북 퍼주기로 일관하고, 동맹보다 민족을 앞세워 북핵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제37차 SCM 당시 미국 측 참석자였던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부차관은 2007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핵우산 조항 삭제 요청 과정을 공개한 뒤 “북한은 영변 핵시설 문제가 해결돼도 핵보유국을 주장하며 사태를 계속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북한은 이제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에 이어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시험 발사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4년 전 핵우산 공약이 삭제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미동맹은 와해 위기에 직면하고 북한은 이를 틈타 주한미군 철수 등 더 노골적으로 한국 안보망 철폐에 나서지 않았을까.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최상의 방위공약을 내팽개친 우(愚)를 자책하며 미국에 핵우산 공약을 다시 요청하는 촌극을 벌이지 않았을까. 16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명문화될 핵우산 공약은 북핵 위협에 대한 강력한 ‘안보 보증서’가 될 것이다. 이번 회담이 과거의 실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북핵 억지의 첩경은 공고한 동맹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윤상호 정치부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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