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시겠습니까?"
앨리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석범의 안색을 살폈다.
"시작하기나 해."
석범은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앨리스는 보안청에 도착하자마자 헤드셋을 기기전담반에 맡겼다. 그들은 이 헤드셋이 12Hz의 맥놀이를 일으켜 알파파를 기저핵으로 방출하며 도파민 분비를 유발하고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청각환각제, 그러니까 일종의 사이버마약이라는 검시결과를 보내주었다. 흥분한 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적어도 24시간 절대안정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석범은 스티머스를 통해 문종의 마지막 기억을 확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앨리스가 스티머스를 작동하자, 대형 화면이 떴다. 삐뚤삐뚤 서툰 글씨로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바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하나가 골목을 따라 걸어 올라왔다. 그 뒤로 그림자 셋이 다가왔다. 여고생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누구세요?"
그림자 하나가 여고생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따라와 봐."
"싫어요. 놔요."
오른쪽 아래 채팅 화면에 'cnrrnakstp'라는 독해 불능 문자가 찍혔다. 나머지 두 그림자가 여고생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멈춰!"
고막을 찢을 듯 큰 소리가 울렸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건물 위에서 그림자들보다 열 배는 더 큰 초록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세 그림자가 쓰러진 여고생을 버려두고 껑충 뛰어올라 초록 그림자를 공격했다. 초록 그림자가 양손을 들어 휘젓자, 세 그림자는 동시에 공처럼 돌돌돌 말렸다.
세 그림자가 동시에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들을 옥죄는 초록 그람자의 힘이 더 강했다. 세 그림자의 팔과 다리가 푸드득 푸득대다가 멈췄다. 화면도 따라서 흐려졌다. 문종의 마지막 단기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가상현실에서 싸우다가 목이 졸렸고 그 바람에 죽었단 말인가?"
앨리스가 이해하기 어렵다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문종에게 앵거 클리닉 치료를 명령한 법원 기록을 검토했었지?"
"네. 가상현실에서 상대 캐릭터에게 폭언을 퍼붓고 구타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며 현실과는 무관합니다. 가상현실에서 목이 졸렸다고 현실에서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저 사이트는 추억을 사고파는 곳이야. '미성 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 비슷한 사이트를 한두 곳 구경한 적이 있어."
"부모님 어깨 너머로 말입니까?"
"그렇다고 해두지. 하여튼 구타당한 여고생을 어떻게든 찾아서 만나보도록 해. 구타당할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상세하게 듣고 와."
"문종이 즉사했으니 나머지 두 그림자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림자는 셋이지만 조종한 이는 문종 하나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세 그림자가 같이 움직였지. 요즘엔 한 사람이 여러 캐릭터를 조종할 때 저마다 다양한 성격과 임무를 부여하는데, 추억의 사이트라서 그런지 엉성해. 셋이 따로따로 놀았다면, 초록 그림자를 공격할 때 바보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뛰어들진 않았을 거야. 셋은 한 몸인 게지."
앨리스는 퍼붓던 질문을 멈추고 석범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은 검사님은 모르시는 게 대체 뭡니까? 보안청 검사가 얼마나 바쁜데, 추억의 사이트까지 손바닥 훑듯 알고 있으니……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초록 그림자는 누굽니까? 누구기에 생김새도 그리 이상하고 힘도 무시무시하게 센 겁니까? 웹사이트의 프로그램을 조작한 것도 문종이 지은 죄목 중 하나였는데, 그럼 초록 그림자는 문종보다도 훨씬 뛰어난 프로그래머겠습니다. 한데 이런 식으로 살해된 예는 특별시 체제 출범 이후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석범이 화면을 돌려 초록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놈은 문종만 노린 거야. 남 형사 말대로 이 사이트에 대해서 문종보다도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우선 문종이 이 낡은 사이트에 집착한 이유를 살펴보자고. 마이크로컴퓨터에선 뭐가 나왔지?"
"그게 이중삼중으로 암호를 걸어놔서…… 암호해독 로봇에 암호 전문가까지 붙어서 이제 겨우 다 풀어간답니다.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화면이 다시 떴고, 많은 파일이 가득 들어찼다. 암호를 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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