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넘어온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스위스는 본래 비밀스러움에 익숙한 나라다. 그런 정서를 고려하면 정운에 대한 관심은 이례적이다.
15일 슈타인횔츨리 공립중의 기자회견장을 찾았을 때 학생들은 취재차 온 기자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만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런 호기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걸어보면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다.
이들의 관심이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21세기에 부자(父子)가 3대째 세습을 시도하고 있는 이 나라를 동화 속에서 무서운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사악한 왕이 지배하는 ‘머나먼 나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16일 베른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 스위스 DRS2 방송에서 마침 ‘게자 안다 콩쿠르’ 결선을 실황중계하고 있었다. 이 콩쿠르는 3년마다 개최되는 스위스의 가장 큰 국제 피아노 콩쿠르다. 우연히 한국 출신의 ‘진상 리(이진상)’라는 이름이 들렸다. 그가 연주한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는데 역시나 곡이 끝난 뒤 스위스 관객 사이에서 ‘브라보(잘했어!)’라는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송 진행자는 연주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 씨가 한반도의 남쪽인 한국 출신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씨는 결국 1등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것처럼 스위스에서 한반도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송평인 파리특파원 piso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