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송평인]스위스서 엇갈린 ‘세습 - 환상 코리아’

  • 입력 2009년 6월 18일 03시 00분


스위스의 권위 있는 일간 베르너차이퉁은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3남 정운(26)이 베른 주 쾨니츠 구 리베펠트 슈타인횔츨리 공립중학교를 다닐 당시 단짝이었다는 포르투갈인 주앙 미카엘루 씨의 인터뷰를 실었다. 미카엘루 씨는 정운이 학교에서 ‘운팍(Un Pak)’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또 정운이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얘기했으나 당시는 그걸 믿지 않았으며, 그가 북한 외교관의 아들이니까 김정일을 한 번 만났을 수는 있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전날인 16일에도 슈타인횔츨리 공립중 측이 마련한 기자회견 내용도 1, 3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했다.

유럽에서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넘어온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스위스는 본래 비밀스러움에 익숙한 나라다. 그런 정서를 고려하면 정운에 대한 관심은 이례적이다.

15일 슈타인횔츨리 공립중의 기자회견장을 찾았을 때 학생들은 취재차 온 기자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만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런 호기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걸어보면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다.

이들의 관심이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21세기에 부자(父子)가 3대째 세습을 시도하고 있는 이 나라를 동화 속에서 무서운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사악한 왕이 지배하는 ‘머나먼 나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16일 베른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 스위스 DRS2 방송에서 마침 ‘게자 안다 콩쿠르’ 결선을 실황중계하고 있었다. 이 콩쿠르는 3년마다 개최되는 스위스의 가장 큰 국제 피아노 콩쿠르다. 우연히 한국 출신의 ‘진상 리(이진상)’라는 이름이 들렸다. 그가 연주한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는데 역시나 곡이 끝난 뒤 스위스 관객 사이에서 ‘브라보(잘했어!)’라는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송 진행자는 연주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 씨가 한반도의 남쪽인 한국 출신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씨는 결국 1등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것처럼 스위스에서 한반도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송평인 파리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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