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말바꾸기와 닭날갯짓

  • 입력 2009년 6월 19일 02시 56분


석 달 전 최문순 민주당 의원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신문사들이 어려운데 동아일보에 가서 지원 방안을 설명하겠다. 협조하자”고 했다. 뜬금없는 데다 (미디어 관련) 국회의원이 직접 오면 크든 작든 빚을 질 것 같아 “담당기자가 갈 테니 설명해달라”고 했다.

며칠 뒤인 3월 19일 경향닷컴은 ‘신문 붕괴 위기, 2조 원 투입해야’라는 제목으로 최 의원 홈페이지의 글을 인용해 올렸다. 최 의원은 “신문 위기 극복에는 공적 재원 투입만이 탈출구”라고 주장했다.

그는 3월 23일 국회도서관에서 ‘신문에 대한 공적 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 토론회를 열고 구독료 인쇄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내놨다. 경향신문 한겨레 등이 참석했고 두 신문은 다음 날 이를 반기는 기사를 실었다. 동아는 정부의 직접 지원은 언론 독립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최 의원은 5월 11일에도 토론회를 열고 신문 구독료에 대한 소득공제 지원책을 제시했고 경향 한겨레 등이 이를 적극 보도했다.

‘각본’처럼 전개되는 과정을 보고 기자는 최 의원의 ‘선의’를 고사한 데 대한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오히려 동아 조선일보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 온 최 의원이 ‘한겨레 경향 살리기’를 위해 잠시 얼굴을 바꾼 것 같았다. 최 의원의 속뜻은 전규찬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인터넷에 올린 ‘경향신문 한겨레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경향신문 안정화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한다”며 “최문순 같은 의원이 구독료 특별공제 법안 등으로 당장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라고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최 의원의 ‘얼굴 바꾸기’는 더 명확해졌다. 그는 6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검찰과 언론의 책임을 묻는다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천정배 의원은 “검찰 주연에 보수언론이 마케팅을 했다”고 했다. ‘박연차 게이트’ 관련 노 전 대통령에게 석고대죄와 고해를 주문했던 한겨레와 경향의 보도는 무시했다. 신문 지원 방안을 함께 고민하자던 최 의원도 다시 편을 갈랐다.

김대중 정부 이후 기자가 말이나 얼굴을 바꾸는 이들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동아를 치켜세우던 좌파 성향의 언론학자가 돌변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1998년 동아가 조선 도공의 후예로 일본에서 성(姓)을 지켜온 ‘심수관 도예전’을 열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개막식에 참석한 데 이어 이해찬 교육부 장관도 관람했다. 이 장관은 기자 앞에서 “민족지 동아일보다운 전시”라고 말했다. 진중권 씨도 2004년 6월부터 넉 달간 동아에 ‘놀이와 예술’ 대형 시리즈를 게재했다. 신문 연재가 처음이었던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인터넷이 의견이 다른 사람을 집단 공격하는 파시즘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메이저의 지면이 탐났을 것이고 동아는 지면 경쟁력을 위해 그 글을 실었다. 아무리 ‘주고받기’라고 하지만 그가 최근 동아를 여러 차례 험담했던 것은 잊기 어렵다.

요즘 통합과 소통이 화두다. 하지만 말을 바꾸는 이들을 겪다 보면 저절로 진정성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된다. 한 교수는 “그들은 모든 사안을 투쟁으로 여기며, 돌변의 행태도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그들에게 통합의 손짓은 아무리 퍼덕거려도 소용없는 ‘닭 날갯짓’밖에 안 될 듯하다. 차라리 그들이 본색을 더 드러낼 때까지 진중하게 기다리는 게 낫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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