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히긴스의 전쟁

  • 입력 2009년 6월 22일 02시 56분


‘갑자기 폭음과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총알이 핑핑 소리를 내며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고, 얄팍한 벽을 관통했다. 기관총 집중사격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포트가 날아갔다. 수류탄이 내가 잠잤던 간이 나무침대 위에서 터졌다.’ 숙소로 썼던 교실에서 북한군의 십자포화 속에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던 사람은 6·25전쟁에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인 마르그리트 히긴스(1920∼1966)였다.

▷히긴스는 1950년 30세 나이에 뉴욕 헤럴드트리뷴지 도쿄특파원이었다. 그는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미국이 참전 선언을 하기도 전인 27일 동료 특파원 3명과 함께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가 전선(戰線)을 누비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르포가 ‘한국전쟁(War in Korea)’이다. 6·25전쟁에 관한 저술 중 가장 빠른 1951년 출간된 이 책은 저자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가 6·25전쟁을 취재하면서 싸워야 했던 대상은 생명의 위협, 굶주림, 마감시간만은 아니었다. 그는 내내 ‘왜 여자가 전쟁터에 뛰어들었느냐’는 미군의 압력과 동료들의 몰이해에 시달렸다. “헤이. 젊은 아가씨. 여기는 당신 같은 여자가 올 데가 아닙니다.” 히긴스를 태운 수송기가 수원비행장에 내렸을 때 심술궂은 미군 대령이 가장 먼저 한 말이다. 장교들이 ‘여성용 편의시설(화장실)이 없다’고 놀리면 히긴스는 ‘한국에는 나무덤불이 부족하지 않다’고 대꾸했다.

▷6·25전쟁 초기 6개월에 대한 생생한 기록인 이 책이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이름으로 올해 번역돼 나왔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이 정작 전쟁 당사국인 우리나라에서 여태껏 소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메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미모를 지닌 히긴스는 나중에 유명 담배회사의 광고모델을 한 적도 있다. 예쁜 얼굴에 화장품 대신 진흙을 바른 여기자는 자유를 지키는 전쟁의 의미를 기사와 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6·25전쟁 기념일이 다가오지만 전쟁을 겪지 않는 국민에겐 ‘달력 속의 기념일’이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자유와 번영은 자유세계에서 온 젊은 군인들이 피로 싸워 지킨 것이라고 여기자가 증언하고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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