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1>

  • 입력 2009년 6월 23일 13시 26분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도 아름답지만, 멈춰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멈추는 이의 앞모습 역시 아름다운 법이다.

노 원장은 달렸다.

제한속도 200킬로까지 올라가는데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경고음이 요란했다.

"속도를 줄이세요. 210킬로부터는 보안청에 보고되며, 무거운 처벌을 받습니다."

가상비서 미스 조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병원, 집, 자동차의 관련 업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위법 사항이 발생할 때는 즉시 보고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달려요! 달려요! 달려요!"

어린 민선이 경쟁하듯 더 크게 외쳤다. 노 원장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200, 201, 202……210!

210에 이르렀을 때, 미스 조가 다시 말했다.

"10년 만에 처음 위법을 하셨어요. 220킬로에 이르면 특별시연합법에 의거 강제로 차가 멈추고,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속도를 늦추……."

그때 어린 민선이 <마왕>의 가사를 제 기분대로 바꿔 노래하기 시작했다. 가사 바꿔 부르기, 이야기 바꿔 읽기, 미로 바꿔 만들기는 민선의 오랜 취미였다. 마왕과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할 때마다 민선은 굵고 가늘고 젊고 늙은 목소리를 도맡아 냈다. 미스 조는 계속 경고했지만 배경음 정도로 묻혔다.

아들아, 무엇이 두려워 네 얼굴을 숨기느냐?

아빠, 아빠는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꼬리를 단 마왕이 보이지 않나요?

아들아, 그건 안개가 만든 띠란다.

"귀여운 아이야, 이리 와서 나랑 가자!

아주 멋진 놀이도 너와 함께 할게.

울긋불긋 꽃들도 해변에 만발하지.

우리 엄마는 황금 옷도 많이 가지고 있단다."

아빠, 아빠,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제게 약속하는 속삭임이?

마음 놓아라, 잠자코 있어라, 아들아!

마른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살랑거리는 소리란다.

"착한 아이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내 딸들이 너를 잘 돌보도록 해 주마.

내 딸들은 밤마다 윤무를 추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너를 재워줄 거야."

아빠, 아빠, 보이지 않으세요,

어두운 곳에 있는 마왕의 딸들이?

아들아, 아들아, 나도 똑똑히 보고 있단다.

그러나 그건 늙은 잿빛 버드나무란다.

"나는 너를 사랑해, 너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반했다.

네가 정 싫어하면, 완력을 쓸 테다."

아빠, 아빠, 마왕이 이젠 저를 붙잡았어요!

마왕이 제게 상처를 냈어요!

219킬로에 이르렀을 때, 노 원장은 멈칫 속도를 줄였다. 220킬로에 닿으면, 자동차를 압수당하고 적어도 다섯 번은 보안청에 가야 한다. 보안청 협력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218, 217, 216, 215.

속도가 줄어들었다. 어린 민선은 입을 꾹 닫고 정면만 응시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단히 화난 표정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속도를 늦추기만 하면, 갑자기 으앙! 울음을 터뜨리거나 발을 동동 굴리거나 아예 핸들을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어린 민선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얘야! 아빠는……."

그 순간 끝난 줄 알았던 노래가 다시 터져 나왔다.

"아버지는 무서워 쏜살같이 달린다네 / 신음하는 아이를 품안에 꼭 껴안고 / 최선을 다해 궁성에 다다랐으나 / 그의 품안에 아이는……."

"그만!"

오른팔을 뻗어 어린 민선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 손은 어린 민선의 얼굴을 뚫고 자동차 앞 유리에 닿았다. 어린 민선은 고개를 치켜든 채 마지막 구절을 도돌이표로 되돌아와서 더욱 힘차게 불렀다.

"그의 품안에 아이는 죽어 있었네."

"이, 이런! 그만 둬. '그리운 님과의 대화' 종료!"

미스 조의 음성이 건조했다.

"다시 명령해주세요."

어린 민선이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보고픈 이와의 대화' 종료!"

"다시 명령해주세요."

"'그리운 가족과의 대화' 종료!"

"깔깔깔!"

"다시 명령해주세요."

"닥쳐!"

그 순간 자동차가 멎었다.

속도가 어느새 220킬로까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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