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시각 자료들이 있는 전시관 안에 들어서면 한 한국인 노병(老兵)의 목소리가 흐른다. 6·25전쟁 때 1사단장으로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8000명 병력으로 한 달 동안 막아낸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의 육성이다. 장군이 3월 이곳을 직접 방문해 녹음한 것이다.
내년에 아흔인 그를 미군들은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대접한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님’을 호명하며 이·취임사를 하고 미 국방부 직원 50∼60명은 매년 리더십 교육으로 백 장군의 강연을 들으러 방한한다. 장군 진급 미군들도 한국에서 그의 전투 지휘 체험을 듣는 게 필수 코스다. 주한 미 8군은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카투사·KATUSA) 우수 병사에게 주는 상을 ‘백선엽상’이라 명명했으며 국내 미 8군 예하 27개 부대들은 매년 이맘때면 앞 다퉈 그를 초청한 지 오래됐다.
용산 미 8군사령부 경내를 걷다 보면 백 장군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젊은 미군들이 많다고 한다. 그가 1992년 펴낸 영문판 ‘From Busan to Panmunje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을 보고 사인을 청하는 군인들이다. 주한미군은 물론 전사(戰史)나 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그의 책은 미국 내 스테디셀러다. 정작 그의 조국은 그를 잊은 지 오래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 친분이 있는 몇몇 군대를 제외하고 대다수 군에서 그를 초청한 일은 없다고 한다. 국방부나 육군본부 같은 최고지휘부대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6·25전쟁을 의미하는 것도 잘 모르고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잘 모르는 요즘 청소년들 중 ‘백선엽’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그가 지난주 펴낸 개정판 6·25 전사 ‘군과 나’(시대정신)를 읽다 보면 풍전등화의 조국을 온몸으로 지킨 한 군인의 삶이 정직하게 담겨 있다. 그 시기 백 장군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운명은 고사하고 내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 식은땀이 난다. ‘군(軍)’이라고 할 만한 체계조차 없었던 국군을 도와 남의 땅에서 피를 흘린 숱한 미군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게 한다. 90 평생을 흔들리지 않고 군인 외길을 걸어온 백 장군의 삶은 ‘어른이 없다’ ‘영웅이 없다’고 한탄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영웅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이 문제다. 서울 강남구가 오늘(24일) 오전 10시 삼성동 코엑스에서 백 장군 초청 강연을 연다. 살아있지만 잊혀진 영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허문명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