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경제를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잘 선별하고 이들과 지속적으로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650억 달러의 폰지(ponzi) 사기로 월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버나드 매도프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속였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조직행동을 가르치고 있는 로더릭 크레이머 교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6월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당신의 신뢰를 악용할 수 있는 사기꾼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한 신뢰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6호(2009년 7월 1일자)에 실린 크레이머 교수의 논문을 간추린다.》
○ 역량 과대평가가 신뢰 위기 초래
신뢰는 인류의 번영과 경제적 활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인류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고 해서 신뢰가 개개인에게도 언제나 유용한 건 아니다. 사람을 쉽게 믿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사기꾼들에게 큰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사기꾼을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력을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레이머 교수는 협상 방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의 재학생 중 95%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나의 능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에 대한 동급생의 신뢰도나 확실성, 정직성, 공정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을 들은 학생 중 66% 이상이 ‘나는 전체 학생 중 상위 25%에 속한다’고 답했다. 20%는 ‘상위 10%에 속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판단력을 과대평가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속을 가능성이 커진다.
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신뢰도를 판단하기 위해 믿을 만한 제3자의 판단에 의존한다. 이를 통해 ‘신뢰의 전이’ 현상이 나타난다. 내가 알고 있는 유력 정치인이 매도프의 금융상품에 가입했다면 그 상품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는 매우 위험하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가설과 반대되는 근거는 무시한다.
○ 위험에 미리 대비해야
크레이머 교수는 현명한 신뢰를 하려면 다음 몇 가지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약속이 깨졌을 때에 대비하기 위해 명확한 대책을 세워둬야 한다. 종종 표절 시비에 휩싸이는 할리우드 작가들은 극의 구성 내용을 미국작가조합(WGA)에 미리 등록해둔다. 따라서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WGA에 등록한 시나리오를 활용해 법률 소송에 대비할 수 있다.
둘째, 상대방에게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 또한 명확하게 인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이다. 상대를 믿고 있을 때는 이에 대한 뚜렷한 신호를 상대방에게 보내야 한다. 또 상대가 자신의 신뢰를 악용하면 강력히 보복해야 한다. 상대를 신뢰하고 있거나, 상대가 자신의 신뢰를 악용했을 때 강력한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이용당하기 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
셋째, 상대의 딜레마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그래서 상대방도 당신을 신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관계를 맺는 능력이 우수한 사람들은 쌍방의 불안감과 걱정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넷째, 사람 그 자체뿐 아니라 그의 역할까지 고려해야 한다. 상대의 역할이나 직급까지 주시해야 그 사람이 당신에게 접근하는 이유와 동기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 실물경제를 주도해왔던 기업가들은 단지 전 세계가 월가의 금융 시스템을 부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월가의 금융 전문가들을 신뢰해왔다.
다섯째, 경계를 늦추지 말고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신뢰하는 상대를 경계하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 때문에 경계의 끈을 팽팽하게 조이지 않는다면 사기를 당할 수 있다. 상대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상대방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버릇을 가진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