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경래]발주기관이 입찰심사 맡으라

  • 입력 2009년 6월 29일 02시 59분


미국에서 연구년을 마치고 귀국한 지 2주일이 지났다. 이사 등 주변정리로 인하여 아직 학교와 지인에게 귀국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벌써 턴키(일괄입찰)공사 심의위원에 등록하고 심의에 참여해 달라는 업체의 요청을 몇 건이나 받았다. 이것이 건설업계 로비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외부 상설심의위 로비근절 어려워

건설업계 로비의 원인은 관급 턴키공사에 있다. 턴키공사는 국제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1975년에 국내에 도입했다. 초기 턴키공사는 낙찰자 결정의 공정성, 공사비 분쟁이라는 문제를 야기했고 대기업의 공공공사 독점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턴키공사 도입 후 30년이 지난 현재, 업체의 공사수행 능력 향상으로 초기와 같은 분쟁은 많이 줄었고 중소업체와의 공동도급을 통해 대기업 독점의 문제도 많이 해소됐다. 하지만 여전히 낙찰자 결정을 위한 기술심의의 공정성 시비와 관련된 업계의 로비는 계속되고 있다.

턴키공사의 낙찰자는 입찰에 참여한 업체가 제안한 기술을 발주기관이 평가하여 결정한다. 도입 당시 대부분의 발주기관은 기술심사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외부 전문가가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부는 외부 전문가를 심사에 참여시키려고 중앙기술심의위원회를 교수 중심으로 구성하고 운영했으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그치지 않자, 현재는 심의위원의 수와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그런데도 업계의 치열한 로비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면서 관행이 될 정도로 보편화됐다.

최근 정부는 다시 소수 외부 심의위원으로 구성된 상설심의위원회를 설립하여 업계의 로비 관행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발주기관이나 업체 모두 이 상설기구의 실효성을 의심한다. 이제는 업계의 로비를 근절하기 위해 중앙상설심의위원회 등의 단편적 처방보다는 근원적인 처방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발주기관의 전문성 확보를 유도하고 발주기관에 전적으로 낙찰자 결정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발주기관 공무원이 책임을 지고 자체적으로 기술심사를 하도록 만드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되면 건설업계 로비의 대상은 외부 전문가가 아닌 발주기관 내부의 공무원으로 한정해 통제할 수 있다. 발주기관을 통제하려면 국가청렴위원회가 발주기관 청렴도를 정기적으로 평가해서 공개하고, 턴키공사가 끝난 뒤에는 사업성과를 사후평가해 책임행정을 구현하는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또한 발주기관뿐만 아니라 구성원인 공무원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싱가포르 공무원처럼 청렴성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과 평가를 병행해야 한다.

전문성 있는 他기관에 위임할 수도

모든 발주기관이 기술심사를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방안은 예산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국 사례는 이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작년 연구년으로 미국 휴스턴에 도착했을 때 허리케인이 불어닥쳐 남쪽 해안 지역이 폐허로 돌변했다. 긴급 복구공사를 주관하는 기관은 텍사스 주정부나 휴스턴 시가 아니라 육군 공병단이었다. 미국은 해당 공공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발주기관의 능력이 부족할 때 전문성을 갖춘 다른 정부 발주기관에 위임하여 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주택공사 토지공사 수자원공사 도로공사 같은 국내 발주기관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전문성을 갖췄고 능력 있는 인재를 많이 채용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전문성 확보가 어려운 발주기관은 전문성을 갖춘 발주기관에 위임해 턴키공사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김경래 아주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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