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6>

  • 입력 2009년 6월 30일 14시 13분


"로봇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이곳은 '배틀원 2049' 4강전 열기로 뜨거운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입니다. 저희 <보노보>에서는 '배틀원 2049'의 모든 경기를 실황으로 생중계해 드리고 있는데요, 이제 5분 후면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시던 4강전. '슈타이거 대 글라슈트'의 격투가 벌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 4강전 해설을 위해 로봇 해설위원 미르코 크로캅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한 시간 반 가까이 <보노보> 방송국 내 스튜디오에서 지난 경기 하이라이트와 경기 결과를 예측하던 방송 팀이 현장에 나와 있는 스포츠 캐스터 정훈일과 로봇 해설위원 미르코 크로캅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오늘도 차분한 성격의 정훈일 캐스터는 프로답게 큐 사인과 함께 흥분 모드로 표정을 바꿨다.

"안녕하세요? 미르코 크로캅입니다. 반갑습니다."

"미르코 크로캅 해설위원께서는 오늘 시합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예측이 어려운 경기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정말 예측하기 힘든 경깁니다. 로봇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은 슈타이거에게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편인데요, 전년도 우승 로봇이고, 지난 경기에서 매우 안정된 경기를 보여준 데다가, 특히 난적 R-AURA 6000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화려한 '토네이도 앤디'가 로봇전문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아, 네 8강전, 정말 난타전 아니었습니까? 8분 32초나 지속된 경기였는데요."

"네, 오늘 경기도 슈타이거의 화려한 발차기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각도와 세기 그리고 회전의 다양함은 마치 한 편의 발레공연을 보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지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4강전, 꿈의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슈타이거와 글라슈트는 링 안쪽 스탠딩 포인트에 서 있다가 신호음과 함께 상대방에게 다가왔다. 경기 시작 사인과 함께 슈타이거는 빠르게 발을 움직이고 허공에 펀치를 가볍게 날리는 등 자체 점검과 함께 몸을 푸는 듯했다. 반면 글라슈트는 긴장한 것 같았다. 몸의 움직임은 자연스럽지 못 했고, 선뜻 슈타이거에게 다가가길 꺼려하는 눈치였다. 겁을 먹은 걸까. 만약 '겁' 모드가 있다면.

슈타이거는 '니킥의 달인' 답게 계속 빠른 스텝을 밟으면서 거리를 유지한 채 발 공격를 시도했다. 글라슈트는 복부와 옆구리를 펀치로 가격하는 바디 블로를 하기 위해 슈타이거에게 끊임없이 접근했다. 그러나 빠르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린 탓에 자꾸 니킥을 허용했다. 1분 12초가 지났을 무렵, 슈타이거는 글라슈트의 턱을 강타하는 브라질리안 킥을 선보여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2분 13초. 계속 니킥으로 글라슈트의 하체를 집중 공격하던 슈타이거가 갑자기 공중 2회전으로 돌려차기 킥을 날렸다. '토네이도 앤디'였다. 8강전에서 이번 대회 최대 다크호스인 싱가포르의 R-AURA 6000을 한 방에 보낸 바로 그 킥이다. 슈타이거는 8강전의 전략을 그대로 가져온 듯했다.

'토네이도 앤디'라는 회전속도가 빠른 발차기 공격이 들어오자, 글라슈트는 준비한 프로그램대로 몸을 반대방향으로 깊게 숙인 후 곧바로 일어나면서 플라잉 니킥을 시도했다. 맞으면 타격이 큰 공격이었지만 아깝게 명치를 스쳐 지나갔다.

'토네이도 앤디' 공격이 실패하자, 슈타이거 팀은 내부적으로 다소 긴장하는 듯 보였다. 글라슈트가 너무 쉽고 빠르게 피했기 때문에 다시 공격한다 해도 적중률이 낮으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슈타이거의 변칙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가오는 글라슈트를 피하지 않고 덥석 끌어안은 슈타이거가 교묘히 턱 위에 달린 이빨로 글라슈트의 얼굴을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목을 물어 주요 배선을 뜯기 시작했다. 주먹으로는 가슴을 집중 공격해 중앙제어시스템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명백히 반칙이었다.

심판이 슈타이거를 제지한 것은 글라슈트의 얼굴이 너덜너덜해진 후였다. 복잡한 배선들이 목덜미 사이로 흉측한 모습을 드러났다. 볼테르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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