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갈등해결의 고비용과 저비용

  • 입력 2009년 6월 30일 20시 01분


2500여 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봄이 되면 광장에 모여 도편추방 투표를 했다. 독재자 출현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정쟁(政爭) 도구로 전락해 엉뚱한 희생자를 낳는 사례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주민소환제가 한국에서도 2007년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중앙정치 무대에서 ‘독재’ 논쟁이 일었는데 지방자치에서도 독재자가 그리 많았는가. 주민소환제가 생각보다 힘을 쓰고 있다.

주민소환은 마지막 수단인데…

김태환 제주지사에 대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면서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민소환투표가 청구됐다. 지금까지 전국 10여 개 지자체에서 주민소환이 추진됐다. 경기 하남에서는 소환투표까지 갔다. 김황식 시장이 지역발전기금 2000억 원을 확보하기 위해 광역 화장장을 유치하려 하자 소환 운동이 시작된 것. 투표 결과 시장 소환은 무산됐지만 화장장 사업도 끝내 물 건너갔다.

주민소환제는 지방자치에 따라 선출직 공무원의 권한이 너무 비대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됐다. ‘주민의 견제와 감시를 강화하면 행정이 투명해지고 주민복리가 나아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님비(Nimby)형 소환 운동이다. 선거공약 이행이나 법정필수공익시설을 막으려는 소환 시도도 있었다. 재개발조합이나 정치적 경쟁자가 남용하기도 했다.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예컨대 소환투표 청구사유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현행 제도를 개정해 ‘위법, 직무태만, 권한남용의 경우에만 소환이 가능하다’고 제한할 수 있다(포지티브 방식). 하지만 이 경우 단체장이 ‘청구 사유가 부적격하다’며 소송을 내면 소환제도 자체가 무력화된다. 단체장 임기 4년 중 처음 1년과 마지막 1년은 소환청구가 금지되므로 청구 후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리면 임기가 거의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국책사업의 이행을 이유로 소환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 것(네거티브 방식)은 어떨까. 물론 제주의 예에서 보듯 청구인들은 ‘정책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절차를 무시하고 권한을 남용했다”는 식으로 에둘러 갈 것이다. 그래도 선언적 규정조차 없는 것보단 있는 쪽이 나을 수 있다. 생각해볼 과제다.

단체장을 쫓아내겠다는 주민소환제는 ‘전쟁’에 해당한다. 갈등 해소의 최후 수단이다. 더 싸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경로를 마련하는 것이 어떨까. 좋은 사례가 하나 있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용지 선정이다. 전북 위도, 부안이 그리도 반대하던 방폐장을 경북 경주는 흔쾌히 가져갔다. 중앙정부가 경주에 지원하기로 한 내용을 곰곰 따져보면 부안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도 그랬다.

주민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방폐장을 일방적으로 ‘떠안기는’ 것이 아니라, 유치조건을 공개한 후 유치희망 지역들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 방폐장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유치경쟁이 시작됐고 경주는 2005년 89.5%의 찬성률로 방폐장을 따갔다. 시스템을 잘 디자인한 덕분이다.

복잡한 갈등 상황에서 ‘개발 대 보전’ ‘민주 대 권력남용’ 등 드러난 주장만 쳐다보면 해법을 찾기 힘들다. 당사자들이 진정 바라는 것에 눈을 돌려야 실마리가 보인다. 주민의 진정한 관심사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역 발전, 소득 증대일 가능성이 크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구현 과정이다. 지난 15년간의 자치를 통해 우리의 지자체 행정이 얼마나 민주형, 주민밀착형으로 개선됐는지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여차하면 주민소환을 발의하는 모습은 ‘갈등 완화 기능만은 아직 걸음마 수준’임을 뜻한다. 제주 사례가 지방자치의 자생력을 북돋는 쪽으로 진행되기를 소망한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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