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제국 러시아의 ‘희생양’ 만들기

  • 입력 2009년 7월 6일 02시 57분


3년간의 모스크바 특파원 생활은 별난 체험이었다. 정치 군사 강국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지배했던 과거와 상당부분 자본주의를 채택한 현실을 보며 생활한다는 게 생각만큼 간단하진 않았다.

이젠 러시아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어김없이 “엄청 고맙다”고 말하는 게 습관이 됐다. 사회주의 시절 가게 앞에서 길게 줄 선 고객에게 물건을 나눠주던 가게 주인과 점원을 의식해서였다. 고객을 우습게 보는 가게 주인의 버릇은 소련이 붕괴한 지 근 20년이 돼가는 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비난의 화살을 가게 주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던 공산당 간부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러시아와 동유럽이 완전한 자본주의 길로 들어섰다는 생각도 착시였다. 올해 극심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등 러시아보다 개방이 빨랐던 국가는 지금까지의 시행착오와 혼란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울 만한 겨를이 없었다. 이들 국가보다 규모가 훨씬 큰 러시아도 자본주의가 만개하려면 몇십 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자원개발 사회복지 교육 분야에서 사회주의가 남긴 유산이 사회 곳곳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 가파른 경제성장,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한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셈이다. 그만큼 사회주의는 뿌리가 깊었다. 러시아 경제부처의 관리는 기자에게 “우리 보고 사회주의로 다시 가라는 말보다 더 심한 모욕은 없을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래도 러시아는 비틀거리고 있던 다른 동유럽 국가에 비해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았다. 제정러시아와 소련 시절 쌓아놓았던 제국 경영의 경험이 그것이다. 지난해 8월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전쟁을 벌일 때 러시아 지상군을 관찰한 적이 있다. 전선에 투입된 군인 중 러시아 출신은 별로 없었다. 그루지야 전방에 사는 북오세티야 현지인들은 “전쟁이 제국의 대리전이기 때문에 러시아 민족이 피를 흘리진 않을 것”이라고 얘기할 때 적잖이 놀랐다. 변방의 오랑캐를 다른 오랑캐로 다스리던 제정러시아와 소련제국의 과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러 소수 민족이 국경을 위협할 때 제국은 그들을 분할통치하며 본토를 지켰던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국내의 정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등 주변국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키는 기술도 뛰어났다. 인위적으로 가상의 적을 만들어 체계적인 상징조작으로 민심을 움직이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모험으로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약소국과 가스분쟁 등을 통해 이런 일을 능란하게 처리했다.

소련이 붕괴됐어도 그 적통을 이어받은 대국 러시아는 경제력과는 무관하게 국제무대에서 패를 움직이며 게임을 하는 글로벌 플레이어였다. 이런 대국과 상대하는 한국이나 북한과 같은 중소국은 자칫 게임의 패로 쓰이며 플레이어에 말려들기 쉽다. 한국이 러시아와 경제관계가 더 두텁다고 어느 때나 한국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북한이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어느 때고 북한을 ‘귀여운 패’로 삼을 수 있다. 러시아는 4월 북한이 쏜 중거리 로켓에 대한 제재 문제를 놓고 마지막까지 저울질했었다.

각국이 러시아판 제국경영 원리를 알지 못하면 좌충우돌식 접근이 계속될 것이다. 기자에게 복잡한 현실에서 각종 상황별 계획을 짜게 만들고 새로운 발상과 임기응변을 가르쳐준 러시아에 “진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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