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중국의 일개 성장이라는 점에서 한국 언론과 정치 지도자들의 무관심은 언뜻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유력한 ‘차차기 최고지도자’ 후보 가운데 한 명이다. 중국의 31개 성장 중 최연소인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근무 경력도 비슷한 데다 ‘미래의 최고지도자’감이라는 점에서 ‘리틀 후진타오’로 불린다. 그는 저우창(周强·49) 후베이(湖北) 성장과 쑨정차이(孫政才·46) 농업부장, 루하오(陸昊·42)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와 함께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지도부의 선두 주자다. 절대 허투루 볼 인물이 아닌 셈이다.
후 성장은 이명박 대통령 못지않게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후베이 성 우펑(五峰) 현은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이 사는 해발 1500m의 산간오지다. 초중고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고무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다녔다.
하지만 이런 궁벽한 곳에서의 생활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학교 성적도 항상 1등이었다. 1983년 8월 대학 졸업 때 ‘우수졸업장’까지 받아 베이징(北京)에 남을 수 있었지만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부러 티베트 오지를 근무지로 택해 19년을 근무했다. 티베트에서도 가장 오지로 중앙 간부들은 절대 가지 않는 모퉈(墨脫) 현을 그는 일주일간 걸어 들어가 현지 주민의 삶을 고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근무태도는 초고속 승진으로 이어졌다. 중국 관가에서 그는 ‘최연소 기록 제조기’로 불린다. 1997년 12월 만 34세의 나이로 부부장(차관)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올랐다. 2006년 11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임명됐을 때도 최연소 부장(장관)급이었다.
후 주석과의 인연도 깊다. 후 주석은 티베트에서 당서기로 재직할 때 일처리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한 그를 미래의 지도자감으로 점찍어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해 초고속 승진을 한 것도 후 주석 후원이 큰 힘이 됐다.
후 성장은 늦어도 2017년경엔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정치국 상무위원(현재 9명)이 되면 자신의 일정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공식 행사의 발언은 모두 다른 상무위원과 상의해야 한다. 이는 후 주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의 당서기나 성장은 개인적인 친분, 즉 ‘관시(關係)’를 맺을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인 셈이다.
일본과 중국이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화해 국면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등 지일파(知日派)와 일본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대표대행 등 친중파(親中派)가 일찍부터 관계를 돈독히 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는 ‘친중파’나 ‘지중파(知中派)’가 별로 없고 중국에도 ‘친한파(親韓派)’로 분류되는 고위직이 없다.
하종대 국제부 차장 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