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2>

  • 입력 2009년 7월 8일 13시 32분


마지막 최고 난이도 퀴즈를 맞히지 못해 처음부터 다시 최저 난이도 퀴즈를 풀어야 할 때의 난감함이여!

민선의 입장은 단호했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면 그녀의 주장이 백 배 천 배 옳았다. 유비쿼터스 시스템이 확고한 특별시에선 도시 전체가 접속 가능 구역이었고, 특히 반경 3킬로미터 안에서는 보안청에 인증등록을 마친 시민끼리 둘만의 '브레인 투 브레인(Brain to Brain)' 접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접속과 해지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강력한 파워가 방송국 전체를 덮고 있었다. 폭발물을 앞에 두고 접속이 끊기면 민선만 희생양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숨어 있는 힘의 원천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곁에 있을게."

석범이 한 번 더 고집을 부렸다.

"석범 씨가 뒤에 있으면 난 아무 일도 못하겠어요. 방해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요. 이건 우리 두 사람 목숨만이 걸린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저 황금 슈트 안에 폭발물이 있다면, 방송국 전체를 날려버릴 지도 몰라요. 특별시민은 물론이고 방송국 안에 있는 로봇들에게 참혹한 최후를 선사하고 싶어요? 그럼 여기 있어요."

"알겠어. 내려가겠어. 내려가겠다고."

레이저빔 장착 안경을 건넨 후 상징탑을 내려오며, 옥상 문을 열며, 비상계단을 걸으며, 방송국 정문 앞에 닿자마자, 석범은 계속 민선을 불러냈다. 민선은, 잘 있다고, 걱정 마라고, 사랑한다고, 꼬박꼬박 답했다.

그녀는 석범이 방송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명심해요. 무슨 일이 생기든 옥상으로 다시 오진 말아요. 알겠죠? 내가 두 발로 상징탑을 내려가서 찾을 때까진 거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아요."

"......"

석범은 즉답을 못했다. 그녀만 두고 왔다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거기 있는 거죠? 접속이 끊긴 건 아니죠?"

"……꼭대기에 닿으면 엎드려. 낮은 포복으로 천천히 다가가."

석범이 시키는 대로 민선은 사다리를 끝까지 오른 뒤 납작 엎드렸다. 대여섯 걸음이면 충분히 사체가 놓인 벤치에 닿을 거리였지만, 그녀는 한 무릎 한 무릎 신중하게 접근했다.

"벤치까지 왔어요. 이제 어떻게 해요?"

"안경을 벗어 슈트 위로 가져가. 슈트에 닿지는 말고 1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해. 안경 렌즈 빛깔이 변하면 즉시 멈춰."

민선이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웠다. 아버지 노윤상의 얼굴은 크고 넓은 슈트에 묻혀 이마만 겨우 드러났다. 민선은 잠시 그 이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부르거나 흐느끼진 않았다. 민선이 안경을 벗고 슈트 위를 쓰다듬듯 휘저었다. 렌즈는 변화가 없었다.

"그 다음은요?"

"안경을 슈트 위에 놓아. 명치 부근이 좋겠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렌즈가 변하면 즉시 멈춰."

민선이 안경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내렸다. 안경 렌즈가 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빛깔이 달라지진 않았다.

"양손으로 안경을 감싸듯 쥐어. 손으로 망원경을 만든다고 생각해. 그 다음엔 슈트를 열 십 자로 쳐다보는 거야. 마음으로 숫자를 세, 하나에서 스물까지. 그럼 레이저빔이 나올 거야. 그때부터 시선을 옮겨. 천천히 목덜미에서 사타구니로, 또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민선이 달걀을 쥐듯 안경을 감싼 후 슈트를 노려보며 숫자를 마음으로 외기 시작했다. 스물까지 세자 안경에서 레이저빔이 나왔다. 석범이 알려준 대로 슈트를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랐다.

슈트에 푹 파묻혔던 노 원장의 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 뺨이 부풀어 오른 것 외엔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민선이 팔을 뻗어 그의 멍든 뺨에 손바닥을 댔다. 노 원장의 고개가 젖혀지면서 이마가 횡으로 쩍 갈라졌다. 안이 텅 비었다. 앵거 클리닉의 환자들을 차례대로 죽인 자와 범행수법이 같았다.

"아, 아, 아버지!"

그때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민선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되돌아온 석범이 그녀의 어깨를 안아 일으킬 때까지 그녀는 오랫동안 아비 잃은 슬픔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왕고모 이윤정이 홀로그램으로 나왔다. 굵은 눈물이 두 뺨을 흘러내렸다.

"빨리 와. 미주가 위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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